전라남도 광주 출신이다. 1919년 1월 동경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 최팔용(崔八鏞) 등 한국인 유학생 등과 2·8독립선언을 계획하였으며, 백관수(白寬洙) 등과 동경에서 김마리아(金瑪利亞) 등 한국인 여학생 10여 명을 2·8선언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해 2월 2일 2·8독립선언문을 휴대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김범수(金範洙)·김기형(金基亨) 등 10여 명과 같이 2·8독립선언 초안을 국내에서 재제작하여 배포하기로 하고, 2월 4∼5일까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 집에서 선언문을 인쇄하였다.
같은 해 3월 인쇄된 선언문을 휴대하고 광주시에서 최한영(崔漢泳)·김강(金剛) 등 5명과 같이 광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한 뒤, 3월 10∼13일 사이에 광주시민 2,00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규합된 시민을 선도하여 1919년 3·1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런데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배판을 받아 이른바 보안법·출판법 위반죄목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경찰의 미행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인천에서 밀선을 타고 신의주를 경유, 중국 칭다오[靑島]에 며칠간 체류하다가 선편으로 상해(上海)에 도착한 후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의 영접을 받았다.
1920년 2월 13일부터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로 근무하다가, 1921년 2월 14일 사임하고 3월 18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전라도 대의원으로 선임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동지들과 같이 상해유화학생회(上海留華學生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소집되어 개최될 때, 6월 20일 창조파(創造派)의 한 사람으로 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 등 30여 명과 같이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9월 러시아로 가서 소련에 의지하려다가 마침 레닌(Lenin, N.)이 죽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924년 3월 동지들과 같이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1926년 7월 29일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조상섭(趙尙燮)·진희창(秦熙昌) 등 10여 명과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