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자정(子正), 호는 난곡(蘭谷).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정유일(鄭惟一)이며, 어머니는 죽산안씨(竹山安氏)로 군수 안수금(安秀嶔)의 딸이다. 박광전(朴光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스승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1589년(선조 22)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 등을 탄핵하는 시론(時論)이 일어나자 이에 실망하여 벼슬에 나아갈 것을 체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스승인 박광전과 의병을 일으켜 여러 곳에서 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여러 뜻있는 선비들과 함께 경전 수백 부를 간행하여 사습(士習)의 진작에 힘썼다.
1606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며,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논핵하자 태학생인 이목(李楘)·오전(吳竱) 등 200여명과 함께 상소를 올려 정인홍을 배척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로 인하여 금고에 처하는 형을 받았다가 안방준(安邦俊) 등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 뒤 용산서원(龍山書院)의 창건에 힘썼고, 박광전의 사적인 「죽천사실(竹川事實)」을 지었다. 뒤에 육현사(六賢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난곡유고(蘭谷遺稿)』 4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