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는 연산군의 폐정이 날로 심해지자 유배지에서 유빈(柳濱)·김준손(金駿孫)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진성대군(晋城大君 : 뒤의 중종)을 옹립하려다가 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에 의해 반정이 성공했음을 알고 중지한 바 있었다.
이 사실로 인해 반정 직후의 논공행상에서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적록(籍錄)되고, 전산군(全山君)에 봉해졌으며, 대사간에 일시 재직하였다. 그러나 정국공신 중심의 지배 체제에 불만을 품은 것이 발단이 되어, 1507년 8월 서얼 노영손(盧永孫)에 의해 모역으로 고변되어 이과는 능지처참당하고 그 연루자인 윤구수(尹龜壽)·신희철(申希哲) 등은 원방으로 귀양갔다.
옥사 이후 고변자인 노영손과 추국(推鞫 : 죄상을 다스리는 것)에 관계한 추관(推官) 등 21명이 정난공신으로 녹공(錄功)되었다. 원래 1등은 추성보사우세정난공신(推誠保社祐世定難功臣)으로 노영손·유순(柳洵)·박원종 등 5명, 2등은 추성보사정난공신(推誠保社定難功臣)으로 민효증(閔孝曾)·이계남(李季男) 등 5명, 3등은 추성정난공신(推誠定難功臣)으로 설맹손(薛孟孫)·홍숙(洪淑) 등 12명을 책정하였다.
그러나 3등공신 강홍(姜洪)을 제외한 21명만이 녹공되었다. 이후 대간(臺諫)의 계속되는 상계(上啓)로 노영손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삭훈되었다. 정난공신은 많은 취약점을 지닌 중종반정 주체 세력인 정국공신 집단이 조장한 모반 무고 사건으로 인해 녹공된 공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