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인보(仁甫), 호는 조계(棗溪). 정지하(鄭之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계우(鄭繼禹)이고, 아버지는 정윤적(鄭允績)이며, 어머니는 신자강(申子杠)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20년 경연기사관(經筵記事官)으로 사관의 올바른 임무수행을 건의하였다. 이어 사서·정언을 거쳐 경상도도사가 되었는데, 이 때 6품에서 5품으로의 승진이 너무 빨랐다 하여 사헌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1527년 지평·문학을 역임한 뒤 헌납이 되어 정병(正兵)의 입역(立役) 과다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2년 후 능성현령으로 나가 직무를 태만히 한다 하여 치죄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집의 등 언관을 거치면서 행신(幸臣)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공격하기도 하고, 향촌교육의 내실화를 건의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폈다.
1536년부터 사간·응교·집의·전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뒤, 승정원우부승지·형조참판을 거쳤다. 1539년 예조참판으로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좌윤·호조참판을 지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선치하였고, 곧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평안도의 양전(量田)을 순찰하기도 하였다.
이어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보임되었다가 부총관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 등 외직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