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자인(子仁), 호는 서계(西溪). 정흥인(鄭興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인지(鄭麟趾)이고, 아버지는 호군 정상조(鄭尙祖)이며, 어머니는 안온천(安溫泉)의 딸이다. 선조의 외할아버지이다.
1519년(중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의정부사인에 재직 중, 홍우룡(洪遇龍)을 심문할 때 담당관인 사헌부집의 오결(吳潔)의 집에까지 가서 구제하다가 1531년경상도 곤양에 장류(杖流)되었다. 이듬해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다음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부승지·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52년(명종 7)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모리배와 결탁하여 방납(防納)하여 그 이익을 나누어 차지하고, 또 상인과 공모하여 각 관청에 납곡(納穀)하고, 예빈시(禮賓寺)의 전복(典僕)을 왜관고직(倭館庫直)에 임명하여 은냥(銀兩)을 무역하였다.
또한, 국고물(國庫物)의 도절범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죄과를 눈감아주는 등 비루한 행동이 많아 양사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중종은 파직에 그치게 하였다. 1559년 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수릉(守陵)의 공로가 있다 하여 숭정대부에 승자(陞資)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