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2년(신종 5)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이듬해인 1203년(신종 6) 경주인(慶州人)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낭장동정(郎將同正) 배원우(裵元祐)를 고부군(古阜郡)에 유배된 경주출신 장군 석성주(石成柱)에게 보내어 반란군의 우두머리로 포섭하려 했으나 석성주가 오히려 최충헌정권에 밀고함으로써 그 전말이 드러나게 되었다.
3월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 김척후(金陟侯)가 반군이 북상하는 것을 진압하지 못하자 김척후를 소환하여 파면시키고 그 후임으로 정언진이 대체되었다. 중군을 맡은 정언진은 4월 경주(慶州) 적도(賊徒)의 도령(都領)인 이비(利備)가 성황사에서 기도를 할 때 무당에게 시켜 그에게 술을 대접하게 하여 취하게 한 후 사로잡았다. 또 7월에는 대정(隊正) 함연수(咸延壽)·강숙청(康淑淸)을 운문산(雲門山)에 보내어 반란 괴수인 패좌(孛佐)를 참살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1204년에 동경(東京)을 경주라 하고, 유수(留守)를 지사(知事)로 강등시켰다. 1215년(고종 2) 8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