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했다.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1895년 오사카 상업학교에서 수학했고, 1897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유럽지역을 돌아보는 등 당시로서는 드문 경험을 한 뒤 1899년에 귀국했다. 귀국 후 친일 개화파로 활동하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3년간 귀양살이를 했으며, 1904년 사면 조치로 상경했다. 이때부터 탁월한 일본어 실력을 바탕으로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을 도왔고, 공진회 회장,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회원 등으로 활발히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러일 전쟁 때의 공로는 통감부가 인정하여 1908년 은사금 30엔을 받았다. 1906년에는 이갑과 함께 서북학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경성일보』의 한글판 주필을 맡으며 언론계에 입문했다. 일본인이 사장을 맡은 이 신문은 일본의 순조로운 대한제국 합병을 위한 선전용 언론이었다. 이듬해 『제국신문』 주필이 되었고, 한일병합 조약 체결 전 공공연히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서양 강국에게 점령당하니 일본의 동정을 구해야 한다면서 한일 병합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한일병합 전부터 일본의 돈을 받는 정탐꾼이라는 세평이 있었는데, 1918년에는 정식으로 조선총독부의 경무부 촉탁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매일신보 주최의 일본구주시찰단 부단장으로 시찰을 다녀오기도 했다. 일본의 신사를 시찰한 뒤 연설을 통해 일선융화(日鮮融和)와 같은 조선총독부의 논리를 그대로 홍보했다. 친일 활동에 대한 세평은 좋지 않아 3·1 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에 김동순과 윤익중·김상옥 등이 친일파 밀정으로 이름이 알려져 민원식과 함께 친일 경찰 김태석을 암살하려는 암살단을 조직했다가 살해 미수에 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을 계획한 대동단의 전협을 의친왕과 연결시켜주었다가 발각되어 조사를 받았다. 수사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적극 협력했다. 정운복의 협조에 따라 전협·한기동·송세호 등 이 사건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복역하게 했다. 1920년 12월 5일 사망했다.
정운복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38∼24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