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정인호(鄭仁昊). 본관은 동래(東萊). 경기도 양주 출신.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군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온국민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에 대항하고 있는데 일제의 앞잡이인 군수로 재직, 충성하고 있음이 못내 굴욕적이고 수치스럽다고 절규한 뒤 그 직을 사직하였다.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한 뒤 1919년 3월 만세시위 후, 동지 장두철(張斗徹) 등 20명과 같이 구국단(救國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어 취임하였다. 당시 중국 상해의 이동녕(李東寧)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지 장두철에게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제휴, 광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방법을 모색하게 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장두철은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김구(金九)·서병호(徐丙浩) 등을 만나 국내외와의 연계 투쟁을 논의하였다. 당시 장두철은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보강리 소재)에 가입, 활동한 적도 있었다.
장두철의 연락을 받은 정인호는 군자금을 모집, 상해로 송부할 것을 결심하고 군수 때 얻은 신망을 바탕으로 군자금 모집을 시작하였다. 서울 인의동 자택에 은밀히 활판 인쇄기를 시설하고, 군자금 모집에 필요한 각종 문서·문권을 인쇄하여 거액의 군자금을 모집, 상해로 송금하였다.
그러나 우체국을 활용해 송금하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1921년 3월 20일 서울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그 해 12월 19일 공판에 회부되었다. 1922년 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7호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