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경유(景由), 호는 궁촌(窮村). 정몽주(鄭夢周)의 11대손이다. 약관으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스승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평생을 두고 『대학』·『심경(心經)』·『근사록』 연구에 전념함으로써 당대 독학(篤學)의 선비로 알려졌다. 1681년(숙종 7)에 송시열이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자 그를 등용할 것을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천거하여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 봉사·직장을 거쳐 주부가 되었다.
이어 연산현감으로 3년간 있다가 사임하였으며, 그 뒤 평시서령(平市署令)·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산음(山陰: 지금의 산청)현감이 되었다.
스승 송시열을 주야로 사모하여 제주도 초산으로 귀양갈 때 중도에 스승을 맞이하였으며, 산음현감을 사직한 뒤 공주의 유성에 복거하였다. 한편, 1679년 정몽주의 사손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송시열의 문인이라 남인 오시수(吳始壽)의 반대로 사손이 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