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 출신.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국군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의 항전이 격화되던 1907년 하반기에 유생 신분으로 거의(擧義)하였다.
방인관(方仁寬)이 이끄는 관서창의군에 들어가 비서(秘書)로서 의병 14명을 이끌고 여주군 이모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또, 안성군 이죽면 칠장사에서 30여 명의 소규모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안성·충주·청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서울 외곽에 은거하던 중, 1907년 9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 뒤 1913년 9월 임병찬(林炳瓚)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일원으로 내각총리대신·조선총독 등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 모금운동을 벌이다가 1914년 4월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1915년 5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죄와 보안법위반죄 등으로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