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군자금 모집 요청서를 받자, 대구에 사는 동지 김두환(金斗煥) 등 10여 명과 연합해 경상도 일대의 부호 명단을 작성하고 금품을 모았다.
같은 해 11월 25일부터 1921년 2월 20일까지 3개월간 6만 8000원(圓)을 임시정부의 무기 구입 자금 목표액으로 결정한 뒤, 각 동지에게 200여 원의 책임모집 액수를 배당하였다.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조선정부를 창립한 총재 정갑룡(鄭甲龍), 부총재 정을룡(鄭乙龍) 명의의 취지문 수십 통을 작성, 배포하였다.
군자금 모집 활동중 대구에서 붙잡혀 5년을 선고받고 항고, 1921년 10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하였다. 1928년 6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일당운동에 영향을 받은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의 서무와 총무간사로서 대구시 달성공원(達城公園) 뒷산 송림에서 동지 6명과 유사시 거사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 극당(極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 방법으로 동삼성에서 농경지를 구입한 뒤 농민을 이주시켜 경작하게 하면서 청년들을 모아 유사시 활용할 수 있게 훈련시켰다. 이에 필요한 군자금은 동지 노차용(盧且用)으로 하여금 모금하도록 하였다.
1928년 5월 11일 대구 시내 총포점에서 신호용 권총을 구입, 소지하고 대구 시내에 거주하는 김교성(金敎成)을 방문해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즉각 거절당하여 협박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공갈,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5년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어 복역하였다. 1942년 칙령 제10호에 의거, 징역 2년 7월 11일로 감형되어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