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평군 ()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정평 부분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정평 부분
인문지리
지명
함경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함경남도 남부에 위치한 군.
개설

동쪽으로는 함주군과 동해, 서쪽으로는 영흥군과 평안남도 영원군, 남쪽으로는 영흥군, 북쪽으로는 함주군과 평안남도 영원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7°10′∼127°40′, 북위 39°37′∼39°40′에 위치하며, 면적 1,143.55㎢, 인구 6만5852명(1944년 현재)이다. 8개 면 178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정평면 동천리이다.

자연환경

서북부 지역은 산악 지대이고 동남부 지역은 해안 지대로 비교적 평탄하다. 낭림산맥이 뻗어내려 황봉(黃峰, 1,736m)·검산령(劒山嶺, 1,127m)·차일봉(遮日峰, 1,743m)·백산(白山, 1,837m)·사수산(泗水山, 1,747m) 등의 높은 산지가 솟아 있고, 그 여맥이 동남쪽으로 도성산(道成山, 643m)·비백산(鼻白山, 157m)을 형성하면서 평야 지대까지 이른다.

동남부 지역은 함흥평야의 연속으로 정평평야가 발달하고 있다. 금진천(金津川)은 황봉·검산령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와 합류하면서 동한만으로 흘러 들어가고 충적평야를 형성하는 주요 하천이 된다. 또한, 이 군과 함주군 경계에 위치한 광포와 그 밖에 많은 작은 내가 흐른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로 한서의 차가 크나, 해안 지방은 바다와 낭림산맥의 영향으로 같은 위도 상의 서해안보다 기온이 높다. 연평균 기온은 10.4℃, 1월 평균 기온 -6.1℃, 8월 평균 기온 22.6℃, 연 강수량 1,033㎜이다. 첫얼음은 10월 하순경에, 마지막 얼음은 4월 초순경까지 언다.

역사

고대

이 군에서 구석기·신석기 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주이면 용강리에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가 확인되고 있으므로 적어도 이 시기부터는 사람이 살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 군은 남옥저에 속하여 있다가, 56년(태조왕 4)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244년(동천왕 18) 위장 관구검(毌丘儉)의 침공으로 국내성이 함락되고 동천왕이 지금의 강계·장진·황초령을 지나 매구(買溝)로 피난하였으므로 이 지방도 한때 전란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삼국이 정립하여 쟁패를 거듭하고 있을 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그 세력이 함경남도까지 미쳤을 때 함주의 황초령에 황초령비, 이원의 마운령에 마운령비를 세움으로써 이 군이 확실히 신라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 뒤 발해가 지금의 북청 땅에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설치하면서, 함경도의 대부분이 발해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이 군의 옛 이름은 파지(巴只) 또는 선위(宣威)라 하였고 983년(성종 2) 천정만호부(千丁萬戶府)를 두었다. 1041년(정종 7) 처음으로 성을 쌓아 관문을 설치하고 정주(定州)로 개칭하였으며 방어사를 두었다. 1044년 압록강구의 위원진(威遠鎭)에서 이곳 정주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몽고 지배 아래 쌍성총관부에 예속되었다가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쌍성총관부를 혁파하고 삼철(三撤:지금의 북청)복주·길주 방면으로 북진의 노력을 계속하여 대체로 동북면을 수복하자, 이 군은 종전의 방어사를 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 평안도의 정주(定州)와 군명이 같다고 하여 정평(定平)으로 개칭하였다. 1422년(세종 4) 속현 장주(長州)를 병합하여 장곡사(長谷社)로 삼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 당시 호구는 811호, 3,819인이었다. 1459년(세조 5)예원군(豫原郡)을 병합하여 독산사(禿山社)로 하였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당시 방리(坊里)는 부내사(府內社)·주이사(朱伊社) 등 9사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구는 2,840호, 1만9080인이었다. 1784년(정조 8)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93년에 복구되었다.

근대

1895년에 편찬된 《정평부읍지 定平府邑誌》에 의하면, 9개 사에 호구는 3,404호, 2만477명이었다. 1895년함흥부 정평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함경남도 정평군이 되었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때 북청 진영의 김운로(金雲露)는 이 군 출신의 의병장으로 보은에서 기병하여 속리산과 청주 미원에서 교전 중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며, 김우선(金禹善)·김예각(金禮覺) 등도 정평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3·1운동 때는 3월 7일 정평읍 장날을 이용하여 천도교·기독교인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를 벌였다. 임시정부의 연통제에서 군감으로 원정준(元貞俊), 참사로 장세환(張世煥)이 임명되었다.

1927년 이 군의 행정조직은 부내면·춘류면 등 9면에 호구는 1만4647호, 8만5444명이었다. 1940년 부내면을 정평면으로, 춘류면을 신상면으로 개칭하였고, 군청 소재지는 정평면 동천리에 있었다. 이듬해 선덕면에 군용 비행장이 창설되면서 1944년 행정상의 편의에 따라 선덕면을 함주군에 이관하였다. 1943년의 호구는 1만4298호, 8만4753명이었다.

유물ㆍ유적

1033년(덕종 2)부터 1044년(정종 10)까지 12년 동안 쌓은 고장성은 평안북도 의주압록강구로부터 이 군의 남쪽 신상면 남흥리의 성 끝까지 축성하였다.

장원면 신흥리·관평리·동계리·서성리·장자리·동양리, 고산면 고양리·남양리 등을 연이으면서 그 성곽이 남아 있다. 장원면 신흥리에는 해족령성지(蟹足嶺城址)라고 불리는 성터가 남아 있으며, 아동리에는 자산성지(慈山城址)가 있다.

신상면 유중리에 토축으로 된 주위 1,281.1m의 세류성(細柳城)이 있으며, 문산면 풍양리에는 1116년(예종 11)에 축성하였다고 하는 예주성(豫州城)이 있다.

신상면 도흥리에는 말갈족이 함경도를 점령하여 축성하였다는 도성지(都城址)가 있다. 정평면 동천리비백산에 고장성지가 있으며, 덕풍리·풍흥리·광흥리·중흥리·봉양리에도 장성의 일부분이 남아 있다. 정평면 영풍리·봉대리·연봉리에는 주위 715m의 봉대고성(蓬坮古城)이 있다.

주이면 왕락리에는 주이고성(朱伊古城)이 있으며, 고산면 남양리에는 주위 85m에 이르는 여인고성(汝仁古城)이 있다. 읍에서 남쪽 20㎞ 지점에 석축으로 축성한 주위 217.6m의 금진강성(金津江城)이 있다.

신상면 동흥리에 토축으로 된 주위 1,338.4m의 원흥진성(元興鎭城)이 있으며, 문산면 풍성리에도 역시 토축으로 된 주위 1,361.5m의 수시리고성(隨時里古城)이 있다. 정평면에는 정평읍성이 있는데 주위 1,796.2m, 높이 3∼4m의 석성으로서 성내에는 우물터가 10개소, 못터가 3개소 있다.

이 밖에 고산면 흥봉리에는 백운산성(白雲山城)이 있다. 이와 같이 군내에 많은 성지가 곳곳에 산재하고 있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정평면 동천리에는 고분 1기가 있고, 문산면 풍성리에는 신흥사지(新興寺址)라고 불리는 절터와 석불이 남아 있다.

주이면 용강리 백운산에는 933년(경순왕 7)에 창건하였다는 환희사(歡喜寺)가 있으며, 고산면 남양리에는 조계사(曹溪寺), 장원면 서성리에 성불사(成佛寺), 광덕면 유흥리에 친견대·불지암 등과 많은 사우가 있다.

교육ㆍ문화

옛 교육기관으로는 정평향교가 중심이 되어 교수 1명이 본부 관원으로 주재하였고, 많은 유생들을 교육시켰다. 1668년(현종 9) 망덕서원(望德書院)이 설립되어 향사와 더불어 이 지역 교육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2년 정평공립간이농업학교가 처음으로 세워졌고, 1921년 공립보통학교에 부설되면서 폐교되었다.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1898년 정평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907년 신상공립보통학교가 개설되고, 그 뒤 초원(草原)·광덕(廣德)·장자(長者)·문산(文山)·귀림(歸林)·주이(朱伊)·고산(高山)·신경(新京)·흥봉(興峰) 등의 공립보통학교와 정평학원·창흥학원(昌興學院)·광일학원(廣一學院)·덕포학교(德浦學校) 등의 사립학교가 계속 설립되면서 교육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신상농업학교와 정평여자실업학교가 있으며, 초등학교는 공·사립을 합하여 20개이다. 종교 상황은 기독교가 크게 전파되지는 못하였고, 1933년 현재 불교 사찰 5개, 개신교 교회 14개가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정월의 윷놀이와 대보름의 농악놀이·횃불싸움과 단옷날의 씨름·널뛰기 등이 있다.

동제는 매년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이나 첫 해일(亥日)에 지내는데, 산신의 제는 소찬으로 새벽에 지내되 농사의 풍년을 위한 우순풍조(雨順風調:비가 때맞추어 알맞게 내리고 바람이 고르게 분다는 말.)를 빌고 마을의 안녕과 수호를 기원한다. 여신제(厲神祭)는 저녁에 모든 마을 사람이 모여서 소·돼지·닭 등 육류와 어류, 그리고 채소와 여러 음식을 차려 놓는다.

장소는 대개 마을 근처의 평지에다 제단을 만들어 놓고 고목이 우거진 곳에 각 집에서 차려 온 제수물을 진설하고 각각 큰 빈그릇 하나씩 놓으면 공동으로 장만한 육류를 분배하여 놓고 제를 지내는데, 제관은 동네에서 미리 선출한 사람이 되어 고축하며 지낸다. 축문 내용은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무사와 건강을 비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흔히 산천제라고도 부르는데, 토속적인 명칭은 기양제(祈禳祭)이다. 동제의 제신은 천신과 지신으로 되어 있는데 지신은 바로 성황신과 여신을 의미하며, 이는 마을의 괴질·전염병·재해 등을 주관하는 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제단은 며칠 전부터 깨끗이 청소하여 정결히 하여 두며, 특히 제관은 며칠 동안 몸을 정결히 하고 출타하지 않는다. 외부 손님을 맞지 않으며, 제를 지낼 때는 제단에 부정한 사람이나 미혼자 등은 참여하지 않는다.

제가 끝나면 약간의 주찬은 제관과 마을 어른들이 함께 제단에서 음복하고 나머지 제물들은 각각 집에 가져가서 가족 또는 초대한 친척들과 먹으며, 마치 축제와 같은 저녁이 된다. 동제 때의 특색은 절대 평등과 공평으로 귀천도 없고 빈부와 장유의 차별도 없으며, 제물이나 대접 또는 축송 등이 한결같다.

다만, 축원자들의 이름을 부를 때만 연령순으로 한다. 이러한 동제 양식은 함경남도의 다른 지방도 비슷하나, 혹 어떤 지방에서는 변괴나 재해가 생겼을 때 임시로 드리는 기양제와 같은 별제도 있다.

설화로는 무속과 불심이 깊었던 곳으로서 이성계와 관계되는 이야기, 그리고 호소설화(湖沼說話)와 불교의 연기설화가 전한다. 호소설화로는 〈장자아비늪〉, 연기설화로는 비구니만 있는 〈환희사의 이야기〉 등이 있다.

광덕면 유흥리에는 〈친견대설화〉가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이곳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그의 기원에 따라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성산에 절을 창건하고 친견대라 하였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답고 우물이 유명하여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절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바위 밑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하나 있다. 이 구멍에서 물과 함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구멍에서 쌀이 나오는 것이 꼭 한 사람이 한 끼 먹을 만큼만 나오므로 이 절에는 중 한 사람만 있게 마련이며, 행여 두 사람이 있게 되면 호랑이가 나타나서 한 사람을 물어 간다고 한다. 어떤 욕심 많은 중이 쌀을 더 많이 얻을 생각으로 구멍을 크게 뚫었더니, 그 뒤로는 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장은 예로부터 무속이 성행하였으며, 단옷날에는 〈단오요〉를 부르며 즐겁게 지낸다. 함경도 전역에서는 불교적인 창세요를 부르는데, 관광객이 가장 많은 환희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부르고 있는 〈무당요〉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허 네로다 네로구나/다시 보우아 네로구나/성튼 몸 병들니고/애를 태우던 네로구나/월후에 다시 만나면 연분인가/왔다 왔소 나 여기 왔소/천 리 타향 나 여기 왔소/바람에 불려 왔소/구름에 싸여서 왔소/아마도 나 여기 오기는/정든님 보려고 왔었나 보다.” 그리고 단옷날에 부르는 〈단오요〉는 “오월이라 단옷날은/천중가절 아니냐/수양청청 버들숲에/꾀꼬리는 노래하네/휘여 칭칭 버들가지/저 가지를 툭툭차자…….”와 같다. 이 밖에도 〈칠석요〉·〈창세요〉 등이 전하고 있다.

산업ㆍ교통

전체 경지면적은 311.9㎢로 논 104.71㎢, 밭 207.19㎢이고, 농가 1호당 경지면적은 논 8.23, 밭 81.32(1943년 현재)로 밭농사가 우세하다. 동남부의 하천 유역에 발달한 정평평야가 주요 경작 지대로서 이 지역은 토양이 비옥하여 미작에 적합하다.

춘류(春柳)·함흥(咸興)·문림(文林)·동성(東成)·정평(定平)·광향(廣香)·광덕(廣德)·도흥(都興) 등의 수리조합이 있어 관개시설이 잘되어 있으므로 쌀 생산 증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감자·채소·콩 등이고 양잠·과수 재배와 수산업·요업·제재·도정업 등도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과 콩·보리·귀리·감자 등의 잡곡이 생산된다.

과수 재배 지역도 매년 증가되고 있어 사과·배·복숭아·포도 등의 생산량도 증가 추세이다. 또한, 특용작물로는 깨·박하·갯버들[杞柳] 등이 있고, 한약재로는 인삼·오미자·당귀(當歸)·창출(蒼朮) 등 약 30여 종에 이른다.

수산업은 근해에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여 조경 수역을 이루어 좋은 어장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 지대의 포덕포(布德浦)·백안(白安)·동안(東安)·송흥(松興)·유성(楡城)·중하(中下) 등의 6개 지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수산업에 종사하는 주민은 약 440호, 1,000여 명이며, 어류로는 정어리·가자미·고등어·대구·명태·연어 등과 조개류·해조류의 어획이 많으며, 대합과 가막조개는 광포의 특산물이다.

광업은 금의 주요 산지로, 한대골·장자(長者)·영평(永平) 금광 등 23개의 광구가 있으나 채굴은 활발하지 못하다. 그 밖에 은·백토·고령토·형석 등도 산출된다.

시장은 대부분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시장의 본래 기능 이외에 혼인·오락·사교 등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읍장(1·9일), 초원장(4·9일), 남장(3·8일), 흥봉장·용흥장·선덕장(1·6일), 부평장(5·10일) 등이 있다. 주요 거래 품목은 농산물·해산물·목재·목공예품 등으로 생활용품의 수요·공급이 이루어지고 있다.

읍장은 본래 풍양리에서 1·6일에 개시되었으나, 신읍장 관계로 2·7일로 변경하였다. 그 뒤 신읍장이 동천리로 이전하여 이동천리의 어시장은 매일 서고 사동천리의 쌀 시장, 삼동천리의 나무 시장, 이호남리의 우시장은 4·9일에 개시되었다. 남장은 신상면 신상리에서 2·7일에 개시되다가 3·8일로 변경하였다.

읍장과 남장이 이 지역의 문화·금융·교통의 중심지로서 각종 산물의 집산지이다. 주요 공산품으로는 농가의 부업인 가마니와 도기·소주·견직물·돗자리·목탄·엿·새끼·과자 등이 있다.

교통은 국도가 정평면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어, 북쪽은 함흥·북청 방면으로, 남쪽은 영흥·원산 방면으로 통과하며 대체로 함경선과 병행한다. 국도의 한 지선은 지경에서 장진과 검산령을 지나 영원군에 이른다. 함경선은 군의 동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며, 문봉·신상·정평·경흥리역 등이 설치되어 있어 교통은 상당히 편리한 편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광포, 신상면 포덕리 해수욕장, 귀림면의 일양대(日陽臺)가 유명하며, 특히 일양대는 해안선을 따라 발달한 백사장과 소나무가 무성하여 여름철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읍ㆍ면

고산면

군의 서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540.64㎢, 인구 9,113명(1944년 현재). 고산면(高山面) 면 소재지는 흥봉리이다. 1910년 여인사(汝仁社)라고 하였으며, 순종 때 고산사(高山社)로 변경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산면이 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은 면의 이름처럼 높은 산지로 형성되어 낭림산맥의 황봉·차일봉·천덕산(泉德山, 709m)·만년산 등이 솟아 있고, 여기서 발원한 지류가 금진천을 형성하며 계곡을 따라 면의 중간 지역을 남류한다.

금진천 계곡의 경사 지대는 주로 농경지로 이용되나 1938년 홍수 피해로 유실되어 범람원을 이루고, 산간 고지대인 관계로 밭농사 위주의 잡곡 생산에 의존한다. 또한, 수렵과 목재·약초도 발달하였다.

공업으로는 보시동의 보생금광에서 금이 생산된다. 교통은 함흥∼평양 간 국도가 상고산 중간 지역을 동서로 지나고, 흥봉리에서 하고산 중간 지역을 지나는 도로가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고양리에 고산사(高山祠), 남양리에 조계사·용연사(龍淵寺)·쌍계사(雙溪寺)·여인고성, 흥봉리에 백운산성 등이 있다. 고양리에 전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황봉과 차일봉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검산령은 함흥∼평양 간의 교통의 요지이며, 관광지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흥봉(興峰)·상서(上西)·덕흥(德興)·풍서(豐西)·풍송(豐松)·신풍(新豐)·신성(新成)·신경(新京)·구창(舊倉)·남양(南陽)·풍양(豐陽)·고양(高陽)·흥천(興川) 등 13개 이가 있다.

광덕면

군의 중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0.90㎢, 인구 1만528명(1944년 현재). 광덕면(廣德面) 면 소재지는 장동리이다. 1910년 산지사(山知社)라 하였으며, 말기에 광덕사(廣德社)로 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세류면(細柳面)의 부평리(富坪里)를 편입하여 광덕면이 되었다.

서쪽은 도성산·어대산·호암산(虎巖山, 333m) 등의 산지가 솟아 있고, 동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광포호에 이른다. 1938년 광향수리조합공사가 이루어져 생산성 향상에 큰 기여를 하였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감자·잡곡 등이 생산되며, 과수 재배·양잠도 이루어진다. 교통은 면의 중심 지역은 국도가 통과하고, 동부 지역은 함경선과 국도가 통과하며, 부평역이 설치되어 있어 상당히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유흥리에 친견대와 덕봉사(德峰祠) 등이 있고, 장천리에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장동(長洞)·향동(香洞)·송오(松塢)·신천(新川)·송천(松川)·율봉(栗峯)·율성(栗城)·유흥(儒興)·선흥(宣興)·장천(長川)·원상(元上)·원흥(元興)·작동(鵲洞)·향흥(香興)·중양(中陽)·장흥(長興)·용응(用應)·향중(香中)·중흥(中興)·오상(五上)·도흥(都興)·인흥(仁興)·문창(文昌)·부평(富坪)·용봉(用峯) 등 25개 이가 있다.

귀림면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6481㎢, 인구 6,179명(1944년 현재). 귀림면(歸林面) 면 소재지는 하남리이다. 1910년 귀림사(歸林社)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귀림면이 되었다.

동북 지역은 높은 산지를 이루어 낙가산이 솟아 있고 서북 지역은 평야 지대이다. 낙가산 남쪽 해안은 편상지와 해변 사구가 발달하여 협소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북쪽 해안은 천연의 항구가 발달되어 있다.

1931년 문림수리조합공사가 이루어져 농산물 생산이 증가되고, 주요 농산물로는 쌀·감자·콩 등이 있다. 수산물로는 명태·고등어·가자미·청어·게 등의 생산이 많고, 수산가공업도 이루어지며,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공급되고 있다. 특히 고등어 자반은 유명하다. 교통은 동부 지역에 중앙부를 낙가산이 가로막고 서북부 지역에 수몰 지대가 있으므로 다소 불편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동상리에 도안사(道安寺) 등이 있다. 특히 도안사는 본래 정림사(正林寺)라고 하였는데 언제 변경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절의 동쪽에는 일양대가 있어 해돋이를 보기 위한 관광객과 피서객이 많다. 상풍리·내동리·송문리에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하남(河南)·동하(東下)·동상(東上)·송흥(松興)·유성(楡城)·장흥(長興)·중하(仲下)·하동(河東)·송문(松門)·신평(新坪)·동성(東成)·신성(新成)·하양(河陽)·중흥(中興)·내동(內洞)·상풍(上豐)·포상(浦上) 등 17개 이가 있다.

문산면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4.42㎢, 인구 7,081명(1944년 현재). 문산면(文山面) 면 소재지는 동천리이다. 고려 시대에는 북변 방어의 요충지로 예주(豫州)라 하였다.

1398년 원흥진(元興鎭)과 통합하여 예원군으로 되었고, 원흥진 지역이 파춘사(播春社)로, 예주 지역이 문산사(文山社)로 분리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산면으로 개칭되었다.

금진천 하류의 남부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남부는 산지가 분포하고 동북부는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1931년 문림수리조합공사가 이루어져 농산물 생산이 증가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감자 등이며, 양잠도 이루어진다.

교통은 면의 동부 지역을 함경선이 통과하며, 문봉역이 설치되어 있으나 주민의 이용이 적으며, 교통이 불편하다. 유적으로는 풍양리에 예주성, 풍성리에는 수시리고성·문산사(文山祠)·정충사(精忠祠)·이택사(麗澤祠) 등이 있다.

동천리·기산리·풍양리·평흥리·문흥리·은흥리에는 청주 한씨, 문흥리에 전주 이씨, 원봉리에 정선 전씨(旌善全氏)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동천(東川)·풍양(豐陽)·소항(所項)·풍성(豐城)·윤봉(輪峰)·기산(岐山)·중흥(中興)·평흥(坪興)·지양(芝陽)·덕화(德化)·수천(洙川)·은흥(殷興)·남양(南陽)·원봉(元峰)·문흥(文興) 등 15개 이가 있다.

신상면

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1.59㎢, 인구 1만5263명(1944년 현재). 신상면(新上面) 면 소재지는 영곡리이다. 고려 시대에는 북변 방어의 군사 요충지로서 원흥진이라 하였으며, 1398년 예원군에 속하였다가 1458년 파춘사로 되어 정평군에 편입되었다.

말기에 파춘사와 세류사(細柳社)가 파춘면·세류면·부춘면(富春面) 등으로 잠시 분리된 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3개 면을 통합하여 춘류면(春柳面)으로 되었다가 1940년 신상면으로 개칭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동류하는 금진천 하류의 북쪽에 형성된 충적평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1923년 춘류수리조합공사가 이루어져 경지정리가 되었으며, 쌀의 곡창 지대로서 다른 지역으로도 공급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과수 재배·양잠도 이루어진다. 수산업은 포덕리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고, 공업으로는 도정·양조·제재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통은 함경선이 통과하며 신상역이 설치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동흥리에 원흥진성, 유중리에 세류성지, 화동리에 쌍봉사(雙峰祠) 등이 있다.

또한, 광흥리·유중리·화동리에 양성 이씨(陽城李氏), 복흥리·덕흥리에 경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포덕리에는 넓은 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철 휴양지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영곡(靈谷)·포덕(布德)·도흥(道興)·복흥(復興)·문진(問津)·유흥(儒興)·월성(月城)·남흥(南興)·향동(香洞)·선덕(宣德)·부암(傅巖)·조양(朝陽)·중흥(中興)·화동(禾洞)·덕흥(德興)·영흥(靈興)·신하(新下)·신포(新浦)·신상(新上)·시흥(始興)·용천(用川)·신성(新成)·동흥(東興)·신흥(新興)·신풍(新豐)·부암(富巖)·유중(柳中)·광흥(光興)·상흥(上興) 등 29개 이가 있다.

장원면

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114.64㎢, 인구 8,361명(1944년 현재). 장원면(長原面) 면 소재지는 양동리이다. 고려 시대에는 북변방어의 요충지로서 장주(長州)라 하였으며, 하림(椵林)·단곡(端谷)으로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장곡사(長谷社)로 되어 정평군에 편입되고, 말기에 장곡사와 초원사(草原社)로 분리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원면으로 되었다.

금진천 중류의 유역으로 동쪽은 어대산, 서쪽은 절마산(絶摩山, 1,055m)이 경계선을 이루며, 그 지맥이 만풍산(萬風山)에 이르러서는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남쪽 경계선이 되고 있다. 고산면에서 계곡을 따라 금진천이 남류하다가 동쪽 방향으로 곡류하여 유역에 분지를 형성하고, 신상면과 문산면 경계의 협곡으로 흘러 들어간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로는 쌀·잡곡 등이 있다. 목재·신탄 등도 생산된다. 공업으로는 원동(院洞)과 하대 지역에 사금광이 개발되고 있다.

교통은 국도가 면의 남부 지역을 통과하며 지방도로가 금진천 연안을 따라 발달되었다. 유적으로는 서성리에 장주고성지(長州古城址)·성불사, 교향리에 모현사(慕賢祠) 등이 있다. 또한 사수리에 연안 이씨, 용연리에 청주 한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양동(陽東)·사수(泗洙)·관평(館坪)·봉림(鳳林)·동계(東溪)·서성(西成)·장자(長者)·동양(東陽)·용흥(用興)·율천(栗川)·용연(用淵)·중평(仲坪)·하대(河大)·아동(衙洞)·교항(橋項)·노하(路下)·신흥(新興) 등 17개 이가 있다.

정평면

군의 중부에 위치한 면. 면적 86.48㎢, 인구 1만6712명(1944년 현재). 정평면(定平面) 면 소재지는 동천리이다. 1910년 부내사(府內社)라 하였으며, 말기에 부내(府內)·창덕(昌德)·흥인(興仁)으로 분리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내면으로 통합되고, 1940년 정평면으로 개칭되었다.

서쪽은 함주군계로부터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의 여맥에 만년산·도성산 등이 이어져 형성되고, 동쪽은 경사면을 이루어 서고동저의 비옥한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광포호에 면한다.

봉대천(鳳臺川) 주변은 토질이 비옥하며 관개시설이 잘 이루어져, 벼농사 위주의 곡창 지대를 이룬다. 또한, 광포호는 관개용수원으로 이용되며 어패류도 많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잡곡 등이 생산되며, 과일과 함께 함흥·흥남 지역으로 공급된다. 공업으로는 요업도 발달하였다.

교통은 여러 지역으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고 함경선이 통과하며, 정평역이 설치되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동천리에 고장성지·망덕서원, 풍천리에 정주성, 예성리의 흥인사(興仁祠) 등이 있다. 또한 광포는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중학교 1개교, 초등학교 5개교가 있다.

동천(東川)·풍양(豐陽)·중흥(中興)·직상(稷上)·풍성(豐成)·풍흥(豐興)·풍천(豐川)·흥상(興上)·풍남(豐南)·남산(南山)·원흥(元興)·서흥(瑞興)·문봉(文峯)·흥덕(興德)·동현(銅峴)·호남(湖南)·흥성(興城)·남흥(南興)·경흥(慶興)·송흥(松興)·송정(松亭)·봉대(鳳坮)·운봉(運峰)·예성(禮成)·구상(龜上)·덕동(德洞)·덕봉(德峯)·영풍(永豐)·포중(浦中)·포상(浦上)·포양(浦陽)·대흥(大興)·연정(蓮井)·덕풍(德豐)·태양(太陽)·신동(新東)·신서(新西)·봉양(鳳陽)·광흥(光興) 등 39개 이가 있다.

주이면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98.47㎢, 인구 1만615명(1944년 현재). 주이면(朱伊面) 면 소재지는 동봉리이다. 1910년 주이사(朱伊社)라 하였으며, 말기에 상주이면(上朱伊面)·중주이면(中朱伊面)·성락면(聖樂面)으로 분리된 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성락면의 동계리(東溪里)를 함주군에 편입하고 나머지 동리를 통합하여 주이면으로 하였다.

북쪽은 보로산(甫老山, 755m)·천덕산·만년산 등의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동쪽은 경사면을 이루며 평야 지대가 발달되어 있다. 광범위한 수리사업에 의하여 대부분의 농지는 몽리 지역에 속하며, 쌀 생산 위주의 농업이 발달하였다. 과수 재배와 양잠도 이루어진다. 공업으로는 신성리에 도자기 공업, 영성리에 금광이 발달하였으며, 과일·도자기·쌀은 다른 지역으로도 공급된다.

교통은 국도가 면의 동부와 중앙을 남북과 동서로 통과하여 편리하다. 유적으로는 동봉리에 중봉산고성(中峰山古城), 왕락리에 주이고성, 용강리에환희사, 추하리에 동산사(東山祠) 등이 있고, 특히 왕락리는 조선태조가 태종에 대한 노여움을 한때 잊고 웃었다는 전설이 있다.

추상리에 성주 이씨(星州李氏), 동봉리·운봉리에 청주 한씨, 동봉리·왕락리에 경주 김씨의 동족 마을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교가 있다.

동봉(東峯)·영성(嶺城)·용상(龍上)·추상(楸上)·추하(楸下)·신덕(新德)·용강(龍江)·노동(蘆洞)·신성(新成)·오리평(五里坪)·풍양(豐陽)·신경(新京)·중흥(中興)·복흥(復興)·왕락(王樂)·왕상(王上)·운봉(雲峰)·신흥(新興)·석마(石馬)·보상(甫上)·보중(甫中)·보흥(甫興)·포항(浦項) 등 23개 이가 있다.

광복 후의 변천

1952년 12월 귀림면·장원면·신상면·문산면이 분리, 신상군이 신설되었으며, 정평면·주이면·고산면과 광덕면의 일부, 그리고 함주군 주지면의 일부를 편입하여 면 행정단위를 폐지하고 이 단위로 분할, 통폐합하여 군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다.

1954년 10월 군의 일부를 분리하여 신설되는 홍산군으로 이관하였으며, 문봉리의 일부를 왕당리로, 호남리의 일부를 정평읍으로, 독산리의 일부를 태양리에 각각 편입시켰다.

한편, 함주군의 수동리 일부와 연지리의 일부를 정평군 포항리에 흡수, 통합하였으며, 신상군의 8개 이가 정평군에 귀속 편입되었다. 1961년 3월 신상군의 삼덕리가 정평군 남창리에 통합되었다. 1974년 1월 신상군이 폐지되면서 그 영역이 다시 정평군에 귀속 편입되고, 신상읍 신상노동자구가 되었다.

이 군은 함경남도 남부 동해안에 있으며, 북쪽은 함주군, 남쪽은 금야군, 서쪽은 요덕군과 평안남도 대흥군과 접하여 있고, 동쪽은 동해에 면하여 있다. 동경 127°06′∼127°34′, 북위 39°36′∼39°53′에 위치하며, 면적 약 743㎢, 인구 14만5천여 명이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정평읍과 신상(新上)노동자구, 구창(舊倉)·고양(高陽)·태양(太陽)·독산(獨山)·다호(多湖)·봉대(鳳坮)·호남(湖南)·구읍(舊邑)·향동(香洞)·장흥(長興)·신천(新川)·율성(栗城)·장천(長川)·장동(長洞)·문창(文昌)·부평(富坪)·서경(西京)·호중(湖中)·남창(南昌)·창신(倉新)·선덕(宣德)·동호(東湖)·삼도(三島)·화동(禾洞)·복흥(復興)·조양(朝陽)·하남(河南)·동하(東下)·신평(新坪)·내동(內洞)·문흥(文興)·문봉(文峰)·동천(東川)·기산(岐山)·풍양(豊陽)·관평(舘坪)·용흥(用興)·중평(仲坪)·사수(泗洙)·초원(草原)·광흥(光興)·신풍(新豊)·신성(新城) 등 43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정평읍이다.

군의 서북 지역은 낭림산맥과 백운산맥의 여맥이 뻗어 있어 높고 험한 산지로 되어 있으나 동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서쪽 경계에는 향로봉(1,554m)·사수산(1,748m)·절마봉(1,054m) 등이 솟아 있으며, 중부에는 만년산(850m)·도성산(642m) 등 비교적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동부 해안 지역은 넓은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다. 금진강이 군의 중남부를 가로질러 동해로 유입하며, 봉대천·구읍천·부평천 등 소한천이 광포에 흘러든다. 광포는 동해안에서 가장 큰 석호로서, 북한 천연기념물 제26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며, 앞바다인 함흥만에는 화도·소화도·세섬·형제바위 등 작은 섬들이 산재하여 있다. 기반암은 화강편마암·화강암이며, 토양은 갈색산림토·충적토로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동해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온난하다. 연평균 기온 9.6℃, 1월 평균 기온 -4.6℃, 8월 평균 기온은 22.7℃이며, 첫서리는 10월 21경, 마감서리는 4월 19일경에 내린다. 연평균 강우량은 1,149㎜정도이다.

산림은 군 넓이의 60%이며, 주요 수종은 소나무·참나무·이깔나무 등이고, 그 밖에 머루·다래·도토리·고사리·도라지 등 산과일과 산채들이 생장하고 있다.

군의 주산업은 농업으로 농경지가 군 전체 면적의 30%이며, 그 중 논이 52%, 밭 34%, 과수원은 12%를 차지한다. 주요 작물은 쌀·옥수수·콩·야채·땅콩 등이고, 과일은 정평과수농장·선덕과수농장·동해지구과수분원 등에서 주로 사과·배·복숭아·추리 등을 재배, 생산하고 있으며, 특히 선덕리 지역에서 나는 배는 맛과 향기가 독특하여 널리 알려져 있다.

축산업은 광포오리농장·선덕종축장·부평가금농장을 중심으로 오리·닭·돼지·소·토끼 등을 사육하며, 그중 광포오리가 유명하다. 수산업도 발달하여 삼도·동하수산협동조합과 9개의 수산분조가 설치되어 있어 명태·대합·가자미·오징어·해삼·낙지 등의 어로를 담당하고 있으며, 대합은 외국에 수출하고 있다. 굉포양어장에서는 백련어·화련어·초어·잉어·붕어 등의 담수어를 양식하고 있다.

군에는 금광·섬아연광·유철니켈광·침니켈광·자철광·수운모·형석 등 다양한 광물들이 매장되어 있으며, 공산품 중 그릇류와 가위는 이 지방의 특산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교통망으로는 평라선(평양∼나진)이 지나가며, 함흥·원산·요덕군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다.

토성산의 진경대와 도안산 정상의 일연대는 예로부터 동해 및 주변의 경관을 관망하던 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남창리의 정평휴양소, 복흥리의 신상휴양소 일대의 주변 경관과 해수욕장이 명소로 알려져 있다. 유적으로는 천리장성의 일부로 정주성·원흥성·석덕성 등 3관문이 있으며, 수시리성·세류성·장주성 등이 있다.

사찰은 성불사·조계사·도안사와 안변 석왕사의 말사인 친견대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정평고등농업전문학교·정평고등학교·영산고등학교 등이 있다. →함주군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太宗實錄」
「世宗實錄地理志」
「輿地圖書」
「新增東國輿地勝覽」
「定平邑誌」
「咸鏡南道誌」(咸鏡南道誌編纂委員會, 1968)
「地方行政區域發展史」(內務部, 1979)
「以北5道30年史」(以北5道委員會, 1981)
「人物의 고향」-北韓篇(, 中央日報社,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집필자
노도양·김성준·이호관·김지용·이한순·김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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