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7년(의종 11) 주조. 높이 22.5㎝. 개인 소장. 소종(小鐘)이지만 제작연대를 지닌 고려 중기 범종의 귀중한 편년자료이다.
우선 S자형으로 굴곡진 용뉴(龍鈕)는 고려 전기 종과 달리 그 입을 천판(天板)상에서 띄워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들려진 왼손 위에는 보주를 잡았다. 뒤에 붙은 음통(音筒)은 가늘고 형식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상부에는 작은 보주 장식이 돌려져 있다.
높게 돌출된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는 여의두(如意頭)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그 아래 1단의 연주문(連珠文)을 둘렀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에는 원권(圓圈)의 범자문(梵字文)을 배치하고 그 여백 부분에는 2단의 뇌문(雷文)이 장식된 동일한 형태로, 고려범종 가운데 범자문이 표현된 가장 이른 예로서 주목된다.
상대 아래 붙은 네 연곽대(蓮廓帶)에는 범자 없는 뇌문대로 장식하였고, 각 내부에 작게 돌기된 연화좌의 연뢰(蓮蕾)를 9개씩 배치하였다. 종신의 연곽과 연곽 사이마다 연화좌 위에 앉아 합장한 모습의 보살상을 1구씩 장식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연곽 아랫부분에는 국화형 자방(子房) 바깥으로 원권 없는 8엽의 연판문으로 구성된 당좌(撞座)가 4개소에 배치되었다.
한편, 종신의 한쪽 면 부조보살상 아랫부분에 ‘正豊二年 庚戌亂中 汀寺住 持比丘宗 於發心□□□□(정풍2년 경술난중 정사주 지비구종 어발심□□□□)’이라는 내용의 오목새김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정풍(正豊) 2년은 정륭(正隆) 2년으로서 고려 태조 부왕의 이름인 ‘융(隆)’을 피하여 ‘풍(豊)’자를 사용한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볼 때 그 2년은 1157년에 해당된다.
고려 후기종으로의 이행을 대변해주는 입상화문대의 정착이 이미 12세기 중엽에 이루어졌음을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