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백익(伯益). 아버지는 정석달(鄭錫達)이며,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입양되었다. 본래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庶人出身)이었으나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 정치달의 처)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지평을 역임하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성격이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였으며, 영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당시 세도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세손(世孫: 정조)이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되자 화완옹주·홍인한 등과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며, 동궁에 사인을 비밀리에 보내어 세자의 언동을 살피게 하였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洪國榮)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광분하였다.
이듬해 정조가 즉위하자 군신들이 그를 주살할 것을 요청, 드디어 경원에 유배되어 천극(栫棘: 조선시대 유배된 중죄인을 가둔 가옥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쳐서 외출하지 못하게 하였음.)되었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