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숙거(叔擧), 호는 모계(慕溪). 아버지는 교위(校尉) 조승윤(趙承胤)이며, 어머니는 평양조씨(平壤趙氏)로 조황(趙璜)의 딸이다.
처음 정사현(鄭思顯)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성제원(成悌元)과 송인수(宋麟壽)를 사사하였다. 1563년(명종 18) 학행(學行)으로 목사 이증영(李曾榮)이 천거하여 견호(蠲戶)의 은전을 받았다. 1568년(선조 1) 사마시에 합격, 이듬해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570년 청주의 유림들과 합의하여 신항서원(莘巷書院)을 창건하였다. 1572년 중부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576년 다시 충청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579년 영릉창봉(英陵參奉)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가 되고 이어 별제(別提)로 옮겼으며, 1581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가 되었다.
1586년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등을 거쳐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1589년 장령을 지내고 은진현감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산과 보은에서 의병 2,000여명을 일으켜 청주에서 적을 격멸, 전공을 세웠고, 의주의 행재소에 수집한 군량미를 바쳤다.
그 뒤 청주의 솔재에서 왜적을 대파하였고, 창의사(倡義使)의 호칭을 하사받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거두어 배로 운반하여 명나라의 지원군을 도왔다. 뒤에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모계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