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광보(廣輔). 호는 방은(方隱). 연산군 때 임사홍(任士洪)이 권력을 장악하여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무인인 박영(朴英)에게 그를 참살(斬殺)하라고 권한 바 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1507년(중종 2) 참의 유숭조(柳崇祖), 호군 심정(沈貞), 전 승지 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박원종(朴元宗)·노공필(盧公弼) 등을 해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의관(醫官) 김공저(金公著), 서얼(庶蘖) 박경(朴耕) 등과 함께 잡혀 국문을 당하였다.
대궐마당에서 국문을 당하면서 옛 글을 소리내어 외우다가 입회한 유자광(柳子光)에게 무오년에 현량(賢良)을 모함하여 죽인 소인이며 아첨하는 신하라고 매도하였고, 박원종에 대하여서도 폐주(廢主: 연산군)의 나인을 첩실로 거느리고 있음을 힐책하였다.
동석한 성희안(成希顔)을 향하여 명유(名儒)이면서 유자광을 섬긴다고 비난하였고, 사신(史臣) 강홍(姜洪)·이말(李抹) 등에게는 사관(史官)으로서 자기의 말을 특서하여 둘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결국 장형(杖刑)을 당하자 통곡을 그치지 않아 박원종 등으로부터 광인(狂人)으로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식견이 고명하였으나 거짓으로 미친체하여 스스로를 감추었다는 평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