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치고 은천군(銀川君)에 봉해졌다. 1386년(우왕 12) 한양도원수 겸한양부윤이 되었고, 1388년 밀직사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李成桂)에 의하여 최영(崔瑩)과 함께 요동을 친 죄로 풍주(豊州)에 장류(杖流)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나서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태조를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에 봉한다는 명제(明帝)의 조서를 받아 돌아왔다.
1394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나라의 중요한 임무를 띠고 외교사절로 세번이나 명나라를 다녀왔지만, 그 때마다 자기의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395년 찬성문하부사(贊成門下府事)가 되어 과전(科田)을 과다하게 받은 죄로 파직되었다가 죽은 뒤에 복직되었다. 시호는 강소(康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