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진천 출생. 본명은 조중흡(趙重洽). 본관은 양주(楊州). 아버지는 조태희(趙兌熙),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문학타임즈』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서울특별시지부 중앙집행위원을 지냈으며 건설출판사를 설립, 주보 『건설』을 발행하였다. 1949년 월북, 그 후 『조선문학』 주필, 평양문학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조벽암의 작품활동은 1930년대 초에 시작되었는데 시와 소설을 거의 동시에 병행하면서 발표하였다. 시작품으로 「새 아침」(『신동아』, 1933.1)·「만추사경(晩秋四景)」(『동아일보』, 1933.12.6∼7)·「새 설계도(設計圖)」(『동아일보』, 1934.2.10)·「봄」(『신동아』, 1934.2) 등을 발표하였다. 시집으로는 『향수(鄕愁)』(이문당서점, 1938)와 『지열(地熱)』(이문각, 1948)을 간행하였다. 조벽암의 시는 지식인의 비참한 현실과, 지식인이 현실에서 느끼는 우수와 권태와 비통함과 증오의 감상을 서사적·설명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벽암의 소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다. 「건식(健植)의 길」(『조선일보』, 1931.8.1∼21)·「구인몽(蚯蚓夢)」(『비판』, 1932.11∼1933.1)·「농군(農軍)」(『비판』, 1933.3)·「처녀촌(處女村)」(『조선문학』, 1933.11)·「파종(破鍾)」(『신동아』, 1935.7)·「취직(就職)과 양(羊)」(『조광』, 1937.3) 등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물들의 사회적 투쟁을 다루거나, 동물에 빗대어 현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이에 비해 「결혼 전후」(『신가정』, 1934.1)·「노승(老僧)」(『조선문학』, 1936.5)·「파행기(跛行記)」(『신동아』, 1936.7) 등에서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간접화되거나 단편적인 인상만이 그려지고 있다. 한편, 역서로 고리키(Gorki, M.)의 『문학론』(1947)이 있다.
조벽암은 당대 현실의 문제를 작품 내부에 진지하게 적용은 하지만, 정치적 이념을 내세우기보다는 도덕 문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당시 프로문학의 관념성과 도식성을 개인의 양심과 문학적 기법으로 일정하게 넘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