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3월 13일 국민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개조안이 상정되면서,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다시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로 크게 분열되었다.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한 만주·상해 대표들과 상해파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들은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한 데 반해, 박용만(朴容萬)을 중심으로 한 북경 및 시베리아 단체들, 그리고 이르쿠츠크파 전로공산당(全露共産黨)은 창조론을 주장, 국민대표대회는 분열되어 혼란에 빠졌다.
회의가 좌초되자 의장 김동삼(金東三)은 서로군정서로 귀환하고 부의장 안창호는 비공산당 개조파로 탈퇴하였으며, 고려공산당도 회의 참석을 거부, 탈퇴하였다. 그러자 창조파 대표들은 의장을 윤해(尹海), 부의장을 신숙(申肅)으로 하여 정부를 세우기 위한 헌법을 제정하고, 1923년 6월 2일 비밀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무위원으로 김규식(金奎植)·한형권(韓亨權)·윤해·고창일(高昌一)·원세훈(元世勳)·신숙·도인권(都寅權)·김철(金徹)·지청천(池靑天)·최동오(崔東玝)·서병호(徐丙浩)·여운형(呂運亨)·정광호(鄭光好)·김상덕(金尙德)·조동호(趙東祜) 등 30인을 선출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고, 5부책임위원을 조직하여 내무에 신숙, 외무에 김규식, 군무에 지청천, 재무에 윤덕보(尹德甫), 경제에 김응섭(金應燮)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조선공화국’이라 정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정하였다.
이에 내무총장 김구(金九)는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국호와 헌법이 있는데도 다시 국호와 헌법을 제정하는 것은 분명한 모반 행위라고 규정, 공고하여 국민대표대회를 즉시 해산시켰다. 이렇게 되자 그 해 8월 조선공화국 임원진은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으나 소련 정부에 의해 추방, 각처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