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한용운(韓龍雲)이 중심이 되어 항일구국투쟁을 위해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학림(中央學林)의 학승(學僧) 청년들을 모아 조직하였다.
이들은 항일구국운동과 함께 불교유신회(佛敎維新會)를 조직, 한용운을 중심으로 불교유신운동도 겸하여 활발히 전개한 바 있다.
이들은 30본산 주지 가운데 혁신·유신을 지지 찬성하는 세력으로 하여금 1923년 종수원(宗數院)을 설립하여 「사찰령(寺刹令)」을 미끼로 횡포하는 교무원과 대결하였다.
이때 한용운은 일본불교의 한국침투와 한국불교의 일본화를 억제하기 위한 임제종(臨濟宗) 운동에 힘쓰고 있었는데, 이는 1911년 이래 지속된 그의 집념이었다.
한용운은 정교분립, 사찰령 폐지, 교단혁신 등을 주장하여 산중불교에서 사회적 대중불교를 건설하는 데 공헌이 컸다고 치하하는 한편, 본연의 불교청년운동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청년승려들은 교단의 유신에 힘쓰다 보니 자연 청년회에서는 뒷전으로 몰리게 되었다. 1922년 3월경 전조선청년단대회를 주최한 단체 중의 하나로 활약하였고 불청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 모금도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1928년 말 재흥할 목표 아래 모인 백성욱(白性郁)·김법린(金法麟)·김상호(金尙昊)·도진호(都鎭鎬) 등이 이듬해인 1929년 1월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헌을 제정하게 하는 등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 뒤 이 단체는 ‘조선불교총동맹’으로 이어져 활동을 계속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