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의 후신으로 1911년 6월에 발족하였다. 사무소는 광화문 기념각(記念閣) 뒤에 있던 전(前) 기로소(耆老所)에 있다가 1912년 5월 재동 취운정(翠雲亭) 안에 있는 일가정(一可亭)으로 옮겼으며, 1915년에는 수송동 숙명여자고등학교 서쪽에 있던 한옥으로 이전하여 6·25전쟁 직전까지 활동하였다.
입학자격은 중등 이상의 학력이 있는 자로 15세 이상으로 규정하고, 학생 정원은 50명이었다. 교육내용으로 전공과목은 조선악과에 가곡·거문고·가얏고·양금·단소·생황, 기타 취악(吹樂)을 두었고, 서양악과에는 악리(樂理)·창가곡조·풍금(風琴:오르간)·사현금(四絃琴:바이올린)을 두었다.
수업시간은 조선악과가 매주 6회, 서양악과의 성악전공이 매주 6회, 기악전공은 매주 5회였다. 수업료는 기악이 매월 1원, 성악은 매월 50전이었고, 서양악과의 풍금·사현금은 매주 1회로 하되, 매회 20이었다.
수업기간은 가곡과 거문고는 1년, 가얏고와 단소는 6개월, 양금은 3개월, 풍금·사현금은 각 1년이었다. 대표적인 교사는 하규일(河圭一)·명완벽(明完璧)·함화진(咸和鎭)·김경남(金景南)·김인식(金仁湜) 등이었다.
연구위원은 홍긍섭·한만용(韓晩容)·함재운(咸在韻)·명완벽·하규일·김인식의 6명으로 ≪악학궤범≫ 3책을 편집하였고, 거문고보·양금보에 의한 남창·여창 반주보 4책을 편집하였으며, <영산회상>과 <여민락>을 서양의 5선보로 채보(採譜:악보를 만드는 일)하였다. 이 가운데 김인식이 5선보로 채보하여 출판한 양금을 위한 <영산회상>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1913년 10월 현재 이왕가(李王家) 잡문서(雜文書)에 나오는 졸업생과 재학생을 보면 조선악과와 서양악과를 합해 졸업생이 제1회(1912) 18명, 제2회(1913) 20명이었으며, 재학생은 49명이었다. 이 후 정악전습소의 활동은 1916년부터 차츰 둔화되었다.
정악유지회의 지원이 흐려지자 차츰 풍류방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극심하여진 1944년에는 잠시나마 문을 닫게 되었고, 광복 후는 한국정악원(韓國正樂院)으로 다시 문을 열어 현재에 이른다.
1943년 무렵까지 정악전습소를 지켜온 사람은 최영재(崔永載)·김인수(金仁洙)·민완식(閔完植)·김윤덕(金潤德)·최성환(崔星煥) 등이었다.
정악전습소는 흩어진 국악의 맥을 계승하게 함은 물론, 이상준·홍영후(蘭坡) 등을 배출하여 우리 나라 초기의 서양음악 발전에도 끼친 바 공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