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조선사회과학연구회라고도 한다.
이들은 시국과 계몽에 관하여 많은 토론과 강연을 가졌으며, 한 때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진상을 규명한다고 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학교에까지 가서 조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무력적인 저지로 묵살당하고 말았다.
회원은 80여 명이었으며, 보성전문학교에서는 이천진(李天鎭)·염근용(廉近鏞)·현운필(玄雲弼) 등 10여 명이 참여하였다. 강령은 ① 사회과학연구 및 보급을 철저히 기한다, ② 인간본위의 참교육실시를 보장한다, ③ 학생들의 사상을 통일한다, ④ 기타 조선학생들의 당면 현안과제의 해결을 최우선한다 등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실천면에서는 항일독립운동을 우선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연희전문학교 이병립(李炳立)·박하균(朴河鈞), 보성전문학교 이천진, 중앙고등보통학교 이선호(李先鎬)·유면희(柳冕熙), YMCA 영어과 박두종(朴斗鍾) 등의 선도로 6·10만세독립운동을 계획, 실천에 옮겼다.
이들 그룹을 흔히 사직동계통의 학생이라 하며, 통동계(通洞系)와 함께 6·10만세 주동학생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