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국내외의 정세는 대단히 혼란하였는데, 거란족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또 여진족의 한 갈래가 동하(東夏 : 東眞國)를 세우고 자주 고려를 침입하였으며 여기에 몽고가 끼어들었다.
1226년 조영수는 서경에서 석준(石俊)·김대지(金大志)·김광영(金光永) 등과 모의하여 4도령(都領)과 낭장 황승룡(黃勝龍)·동방림(東方林)을 죽이고 그 군대를 빼앗아 개경을 침범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 대정(隊正) 김국인(金國仁)의 고발로 서경유수 진식(陳湜)이 군사를 일으켜 모두 잡혀 죽었다.
이 사건은 서경과 개경과의 오랜 세력다툼의 여파로 일어난 것으로, 고려 태조 이후 서경은 개경과 비슷한 비중으로 중시되었는데, 묘청(妙淸)의 난과 조위총(趙位寵)의 난 이후 서경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따라서 서경에서는 무신정권 이후 여러 차례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 역시 서경세력의 강화, 나아가서는 1217년 최광수(崔光秀)의 난에서 보여지는 고구려 부흥운동과 연결지을 수 있는 성격을 지녔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