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공(玉工: 玉匠人)의 아들로, 어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관기(官妓)였다. 신분이 한미(寒微)하여 관직이 7품으로 제한되었지만,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때 하급장교였지만 행동무인으로 이의방(李義方)을 도운 공이 커서 낭장이 되었다가 뒤이어 장군에까지 올랐다.
더구나 1181년(명종 11)에 공부상서(工部尙書)를 거쳐 1183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까지 올라 현달하였다. 이는 정중부정권 때 무신정변의 행동무인이었던 조원정과 최세보(崔世輔), 이의민(李義旼) 등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고, 경대승정권도 그들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고위 관직을 제수하였기 때문이다.
조원정은 성품이 탐학하고 포악하여 자기의 청탁이 거절당하면 마구 행패를 부렸다. 한번은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장동(李長同)에게 말에게 먹일 꼴을 요구하였는데, 이장동이 다른 사람의 땅을 빼앗아 재물이 넘쳐나는데도 관청의 물건을 요구하느냐며 꾸짖자 중방(重房)에 무고하여 남쪽으로 유배 보내었다. 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있을 때에는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았고, 심지어 말의 덮개[馬衣]까지 거두어 집으로 보냈으며, 머리가 긴 사람을 보면 그 머리털을 깎아 다리[髢]를 만들어 가졌다.
1187년에는 중서성(中書省)의 공해전(公廨田)의 조세를 횡령하려다가 문극겸(文克謙)·최세보(崔世輔)·문장필(文章弼)·두경승(杜景升)·이지명(李知命) 등의 탄핵을 받아 공부상서로 좌천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고 석린(石隣)·석충(石冲)·주적(朱迪) 등과 내통하고 가신(家臣)인 고영문(高令文)·임춘간(林椿幹)·준백(俊白) 등 70여명을 시켜 밤중에 수창궁(壽昌宮)에 침입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 양익경(梁翼京), 내시낭중(內侍郎中) 이규(李揆)·이찬(李粲) 등을 죽였다.
왕에게는 재상 두경승, 급사중(給事中) 문적(文迪) 등이 주동하였다고 무고하여 그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사실이 밝혀져 살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