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야주(大耶州) 사람으로, 선간(撰干) 학열(郝熱)의 아들이다. 642년(선덕여왕 11)에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지역)이 백제군에게 함락될 때 최후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아버지 학열이 지방의 토착지배자인 촌주(村主)들에게 주어진 외위(外位)를 가지고 있고, 죽죽이 전사한 뒤에 그 처자들이 왕도(王都 : 경주)로 옮겨 살게 된 것을 보면, 왕경 6부출신이 아닌 지방의 촌주가계의 출신으로 보인다. 642년에 백제군에게 포위당한 대야성의 신라군은 고립되어 밖으로부터의 원군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도독(都督) 김품석(金品釋)에게 아내를 빼앗겨 원한을 품었던 사지(舍知) 검일(黔日)이 창고를 불질러 신라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전의를 잃고 당황하고 있는 신라 지휘관들을 백제의 장군 윤충(允忠)은 항복하도록 꾀고 있었다.
당시 사지였던 죽죽은 적의 계략에 빠지지 말고 끝까지 항전하자고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항복하려고 성을 나간 신라 장병들은 백제 복병에게 몰살되었으며, 김품석도 처자와 함께 자결하였다.
이에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항전하였다. 사지 용석(龍石)은 항복하여 후일을 기하자고 하였으나 “그대의 말도 옳지만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지은 것은 추운 때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살아 항복하리오.”하고, 힘써 싸우다가 용석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선덕여왕으로부터 급찬(級飡)의 관등으로 추증되었으며, 또한 그 처자들도 왕으로부터 상을 받고 왕도로 옮겨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