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어중문학 ()

목차
현대문학
개념
중국어와 중국어로 쓰인 문학작품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목차
정의
중국어와 중국어로 쓰인 문학작품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내용

중국에는 한족(漢族) 이외에 몽고족·티베트족·만주족·위구르족 등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고, 사용하는 언어도 제각기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한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중국어[한어 漢語]’라 부르고, 한어로 표현된 문학을 ‘중국문학’이라 한다.

중국어를 연구하는 ‘중국어학’에는 한자의 자형과 그 변천을 연구하는 문자학, 한자음의 변화를 연구하는 성운학, 고대 한어 자구(字句)의 뜻을 연구하는 훈고학, 한어의 어법을 연구하는 문법학, 각 지방의 방언을 연구하는 방언학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중국문학에는 고전문학 분야에 시·산문·사부(辭賦)·사(詞)·산곡(散曲)·희곡·소설·강창(講唱)·비평, 현대문학 분야에 시·산문·소설·희곡 등의 장르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현대적 의미의 중국어 교육을 처음 실시한 곳은 한말에 설립된 관립 한성한어학교(漢城漢語學校)였고, 중어중문학 강좌가 정식으로 개설된 곳은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 지나(支那)문학 전공 과정이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그 과정을 인수하게 되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중국과 몇 천년 동안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온데다, 한문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감정을 표현하여 왔으므로, 한국에서 중어중문학 연구는 오랜 역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고려에서는 물론 조선시대에는 과거(科擧)로 ≪사서 四書≫·≪삼경 三經≫의 대의를 묻는 강경(講經)을 두었고, 부(賦)·송(頌)·표(表)·전(箋) 및 책(策)을 짓는 시험 방식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사대부 계층은 ≪사서≫·≪삼경≫·≪문선 文選≫·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의 문장을 숙지(熟知)해야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중어중문학 연구는 현대적인 의미의 중어중문학과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보였다.

첫째, 중국 문학을 외국 문학의 일종으로 대했다기보다는 우리의 보편적인 문학으로 여겼던 것이다. 둘째, 중국의 문학·사학·철학등을 구분 없이 함께 연구하면서 경서(經書)의 함의 파악에 치중했던 점이다.

그래서 신학문이 출현하기 이전의 중어중문학 연구 업적을 따로 떼어 살펴보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 결과 그 업적은 자연스럽게 국어학·국문학·한문학·한국철학·한국역사학 등과 포괄적으로 연계되었던 점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한 두 가지 특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곧 한자가 뜻글자인 반면 한글은 소리글자이기 때문에 한자의 발음을 한글로 적은 서적들이 많이 저술된 점이다. 그 중에는 한국인들이 발음한 한자음과 뜻을 적은 ≪옥편 玉篇≫과 같은 것이 있고, 명(明)·청(淸)인들의 한자 발음을 한글로 옮겨놓은 자료들도 있다.

몽고인이나 명나라 때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자의 발음을 적어둔 자료를 제외하면 우리 나라의 이러한 유산은 중국어의 옛 발음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또, 한글창제 뒤에 많이 나온 경서의 번역서나 ≪두시언해≫와 같은 것은 중국의 원전이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문헌이다.

중국인들이 비교적 후기에 유행시킨 사·산곡과 같은 장르나 그들의 구어체인 백화문체(白話文體)로 쓴 희곡과 통속소설 등은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한자로 시와 산문을 지으며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적어도 갑오경장 또는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중국 문학에 대한 소양은 사대부들에게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허다한 중국의 서적들이 수입, 전파되었으며, 또 그 과정에서 많은 작품에 대한 필사·번역·주석·비평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유산들은 한국학과 중국학의 양 영역에서 새로운 연구 과제로 부상(浮上)되고 있다.

갑오경장 이후부터는 국한문혼용, 과거제도의 폐지, 서구문물의 도입, 중국의 정치적·문화적 지위의 하락 등으로 중국문학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열도 급격하게 시들어갔다.

경술국치 이후로는 사회체제가 변혁됨에 따라 한문과 관련된 중국문학도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지나[중국]문학 전공이 개설되면서 다시 연구 분위기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고지마(兒島獻吉郞)·웨이젠궁(魏建功) 등이 강의하였다.

한국인 학생으로는 ≪조선한문학사≫라는 졸업논문을 쓴 김태준(金台俊), 뒤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된 이명선(李明善)·차상원(車相轅)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보성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등에서도 중국어 강의가 개설되었는데, 정내동(鄭來東)·김정록(金正祿) 등이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각각 강의를 맡았으며, 정인보(鄭寅普)·홍명희(洪命熹) 등은 대가로서 한문을 가르쳤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지나(支那)문학과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중국어중국문학과로 개명(改名)되었으며, 1955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에 중국어과가, 이듬해에는 성균관대학교에 중어중문학과가 창설되었다. 중·미(中·美)간의 냉전이 완화되면서 1972년부터 1980년대 초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30여 개 대학에 중문과가 창설되었다.

특히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된 뒤로는 한·중간의 학술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졌으며, 중국학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수요도 급증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98년 현재 전국에 100여 개 대학(전문대 포함)에 과가 설치되었고, 또 매년 수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현재 전국 각 대학 중어중문학과에서 강의하거나 한문학과·국문학과 등 인접 학과에서 중어중문학 및 한중비교문학을 연구하는 학자 수를 합치면 1,000여 명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적어도 수적인 면에서 본다면, 중국과 대만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제일 많은 수의 전공인원을 가진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에 비하여 질적인 연구 수준은 그리 높다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장기간의 수련을 요하는 중국 고문(古文)을 체계적으로 익힌 사람이 드물고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와 민족 분단을 거치면서 선인의 한학전통을 계승할 여건을 잃게 되어 중어중문학 연구를 심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 초부터 전공영역별·지역별·학교별로 중국어문학과 관련된 여러 유형의 학회들이 조직되어 그 나름대로 수준을 제고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장르별 학회인 중국언어학회·중국희곡연구회·중국소설학회·중국산문학회·중국고전문학이론연구회·중국현대문학회들이 학술발표회를 거쳐 간행하는 장르별 학보는 그간의 연구 성과를 집적해 가고 있다.

그리고 원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우면서 근실한 학술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원전 번역 작업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전문연구서적의 발간도 활성화되어 가고 있다.

한·중간의 역사 지리적인 관계 및 양국간의 상호 협조 추세로 보더라도 중국어문에 관한 연구는 중대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 연구는 더욱 객관적이고도 심도 있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중국문학을 찾아서』(이장우, 1994)
「중국문학연구현황」(이장우, 『동양문화』 20, 1981)
「한국중국어문관계론저 및 번역 98종해제」(이장우 외, 『중국어문학』 5, 1982)
「중국문학연구사장편 Ⅰ·Ⅱ·Ⅹ」(이장우 외, 『중국어문학』 1·2·11, 1980∼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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