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 출신.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잠시 소학교 훈도를 하다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거기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출감 후 민족운동의 방편으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1922년 함흥에서 예림회(藝林會)라는 극단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지방의 아마추어극단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는 상경하여 김소랑(金小浪)과 함께 취성좌(聚星座)라는 극단을 운영하다가 극단이 제대로 안 되자 1929년 스스로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라는 극단을 조직하였다. 최초의 본격적인 동인제 극단을 발족시킨 그는 배우 변기종(卞基鍾)을 대표로 앉히고 자신은 전무로서 뒷바라지만 하였다.
그의 원대한 이념은 연극운동을 통한 민족의 독립이었지만 당장의 목표는 연극전용극장 건립과 연극의 직업화였다. 그는 고향에 있는 전답까지 모두 팔아서 연극운동에 썼고, 세 자매(崔順·京順·季順)까지 연극배우로 만들었다.
그러나 1935년 동양극장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설립되자 조선연극사를 스스로 해체하고 낙향하여 불우하게 살았다. 남은 재산을 정리하고 서울로 온 그는 광복 직후 지병으로 작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