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사규(士赳). 호는 송계(松溪). 고려조의 문인으로 유명한 진화(陳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참판 진인해(陳仁海)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의협심이 많으며, 글을 배우면서도 무예를 좋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군관으로 있으면서 그 해 6월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부터 공을 세우고 용명을 날렸다.
육상에서 진주전투가 있을 때에도 정탐 연락의 임무를 띠고 적의 진중을 왕복하여 수훈을 세웠다. 1597년 원균(元均)이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고 적의 재침으로 수군이 열세에 몰렸을 때에도 동요하지 않고 화공으로 적선을 무찔러 애국충절의 기개를 보였다.
뒤에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34세가 되던 1599년에 비로소 무과에 급제하고, 유원진첨사(柔遠鎭僉使) · 경흥부사 · 통제영우후(統制營虞候) 등의 무관요직을 두루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있은 뒤에 장재(將才)가 거듭 인정되어 다시 북방요지 구성군수에 임명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흥의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후일 용강사가 훼철되자 1882년(고종 19)에 영호남 유림들이 장군의 출생지인 이곳에 사우를 복원하여 무열사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