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 때 대관(臺官)으로 법도에 맞지 않는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을 집사하는 별가(別駕)를 잡아 가둔 것이 문제가 되어 시어사(侍御史)에서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郎)으로 좌천되었다.
1125년(인종 3)에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서 상의봉어(尙衣奉御) 최학란(崔學鸞)과 함께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때 금나라에서는 국서(國書)가 표문(表文)이 아니고 또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1135년에 묘청(妙淸) 등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우군사(右軍使) 이주연(李周衍) 아래 양우충(梁祐忠)·진경보(陳景甫)·왕수(王洙) 등과 함께 부사(副使)가 되어 출정하였다.
뒤에 전군사(前軍使)로서 윤언이(尹彦頤)와 의논하여 화공(火攻)을 하기로 결정하고, 판관(判官) 안정수(安正修) 등을 시켜 화구(火具) 500여 석(石)을 만들게 하여 조언(趙彦)이 만든 석포(石砲)를 쏘자 그 불꽃은 번개와 같고 그 크기는 수레바퀴와 같았다고 한다.
1136년에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겸 태자빈객(禮部尙書同知樞密院事兼太子賓客)이 되었다가 그해 병부상서 지추밀원사(兵部尙書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138년에 우복야(右僕射)가 되었고 다시 추밀원사가 되었는데, 이 때 앞서 서경을 정벌할 때 남의 노예와 보대(寶帶)를 뇌물받은 사실로 인하여 어사대(御史臺)의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다.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치사(致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