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부산광역시, 서쪽은 마산시, 남쪽은 진해만을 사이에 두고 거제시, 북쪽은 창원시 · 김해시와 접하였다. 동경 127°40′∼128°50′, 북위 35°03′∼35°10′에 위치한다. 면적은 120.19㎢이고, 16만 8696명(2008년 당시)이었다. 과거 시청은 경상남도 진해시 풍호동(시청로1번지)에 있었다.
2010년 3월 2일 국회에서 진해시, 마산시, 창원시를 창원시로 통합하는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같은 해 7월 1일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였다. 통합 창원시가 탄생함에 따라 기존 진해시는 통합 창원시의 진해구로 개편되었다.
태백산맥의 남서부 말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오랜 지질시대 동안 이루어진 삭박작용에 따라 산지의 해체가 진행되어 있기는 하나 경사가 급한 산지가 해안선을 따라 분포하고, 여기서 뻗은 한 단계 낮은 산등성이가 해안에 몰입하고 있다. 배후에는 가파른 산지가 존재하나, 해안으로는 산지에서 뻗어 나온 해발 500m 안팎의 기복이 적은 완만한 산등성이의 만장년산지와 이들 산지사이에 발달한 소규모의 침식분지로 이루어져 있다. 시가지의 중심은 동서로 뻗은 해안 산맥의 사면 및 구릉지와 해안저지로 구성되어 있다.
신생대 제3기 밀양단층 및 양산 단층운동에 의해 생긴 신어산맥은 진해의 주요 산지를 구성하는 주요 산맥이다. 신어산맥은 불모산(801.7m)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남동쪽 지맥은 화산(花山, 798.4m), 굴암산(屈巖山, 662m), 보개산(寶蓋山, 479m)으로 이어지며, 남쪽 지맥은 웅산(693.8m), 천자봉(502m), 대발령(284m)으로 연결된다. 서부지역은 웅산에서 북쪽으로 갈라지는 또 하나의 지맥이 높은 산지를 이루는 데 장복산(582.2m)과 산성산으로 연결되면서 마산만으로 몰입한다.
지형적으로 태백산맥이 포항구조분지에서 단층운동에 의해 남서방향으로 진로를 바꿔 달리다가 대한해협에 몰입함에 따라, 현동반도, 도만반도, 안곡반도, 안골반도 등 소반도와 잠도, 우동, 수도, 연도 등 도서 그리고 진해만 · 웅천만 · 와성만 · 웅동만 등 크고 작은 만입이 발달하는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을 지닌다. 진해만은 만곡이 깊숙이 들어가 있고 수면이 잔잔한데다 수심이 깊어 우리나라의 제일의 군항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이 항만의 이상적인 조건으로서 시 남부의 남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거제도와 동남부의 가덕도 등이 천연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진해를 구성하는 산지가 진해만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유로가 짧고 거의 직선상이며 구배가 급한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하천이 발생적으로는 경사에 따라 흐르는 필종하천에 해당하며 만으로 유입하기 때문에 해양유역을 가진 하천으로 볼 수 있다. 하구 부근에 대부분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분포하고 있다. 한내(대천)과 여좌천(餘佐川)은 시가지를 관통하여 각기 옥포만과 행암만으로 유입한다. 이 외에도 하구 한내(냉천), 곰내(동천), 마천 등이 북쪽의 산지부에서 흘러 내려와 남해로 흘러든다.
진해시는 겨울기간에도 쓰시마난류가 진해만에 유입하기 때문에 동안기후로서의 대륙성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우리나라 다른 지역에 비해 연교차가 적은 해양성기후대에 속한다. 기온은 온난하며 연평균기온 14∼15℃ 1월 평균기온 2.5℃, 8월 평균기온 27.1℃이다. 여름계절풍과 저기압의 통과 등으로 남해안 다우지역에 속하는 이 지역의 연강수량은 1,490㎜내외이다.
지질 분포상 경상분지의 남단에 해당한다.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경상계 누층의 각종 퇴적암과 화산암류로 구성되어 있으나 제4기에 퇴적된 역층 및 충적층도 분포한다.
난온대삼림지대에 속하여 온대와 난대식물이 자생하며 특히 쓰시마난류의 영향으로 비교적 높은 지대까지 난대작물이 자라고 해안선을 따라 난대식물과 해안식물이 풍부하다. 삼나무 · 편백 · 해송 · 리기다소나무 · 버지니아소나무 · 오동나무 등이 대표적인 식물군 이다.
진해만 · 웅천만의 해안지대에 선사시대의 유적이 분포되어 있어 이 지역이 예로부터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알맞은 곳이었음을 증명한다. 자마산의 웅천패총(熊川貝塚)과 거기에 따른 주거지는 1세기경 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으로서 당시의 문화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진해만 연안의 패총들도 대략 이와 같은 시기의 유적들이다. 변진(弁辰) 12국과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부족국가 가운데 어느 것이 이 지방에 해당되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는 가야연맹의 세력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웅지현(熊只縣)과 골포현(骨浦縣)에 소속된 완포향(莞浦鄕)이었다. 757년(경덕왕 16)웅지현은 웅신현(熊神縣)으로, 골포현은 합포현(合浦縣)으로 개칭되어 함께 의안군(義安郡: 지금의 창원)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건국 후 완포향이 현으로 승격되었는데 그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018년(현종 9)의안군 · 합포현 · 웅신현과 함께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의 속현이 되었다.
1407년(태종 7)웅신현의 내이포(乃而浦 또는 薺浦)가 개항되어 왜관이 설치되었다. 세종 때 제포에 수군첨절제사영(水軍僉節制使營)이 설치되어 안골포(安骨浦) · 사량(蛇梁) · 당포(唐浦) · 영등포(永登浦) · 옥포(玉浦) · 조라포(助羅浦) · 평산포(平山浦) · 적량(赤梁) 등 8진(鎭)을 관할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당시 호구 수는 웅신현이 63호 318인, 완포현이 37호 1,079인이었다.
1452년(문종 2)웅신현과 완포현이 합쳐져서 웅천현(熊川縣)으로 개칭되었고 현감을 두었다. 1510년(중종 5)제포를 비롯한 삼포에 왜인들이 난동을 부린 삼포왜란이 일어났는데, 왜란이 평정된 뒤 웅천현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곧 현으로 환원되었으며, 왜관은 1544년 폐쇄되어 부산포로 옮겨졌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휘하의 수군이 안골포해전에서 적군을 섬멸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적의 주력부대가 웅천에 상륙하여 안골포와 웅천에 왜성을 쌓아 그들의 기지로 삼았다. 1759년(영조 35) 웅천현의 호구 수는 3,153호 1만 3,839인이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정으로 진주부 웅천군으로, 1896년에는 경상남도 웅천군으로 개편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 연합함대가 진해만을 그들의 기지로 삼고 각종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진동지에 있던 진해군이 폐지되어 창원군에 편입되자 일본인들이 지금의 진해시 지역을 진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10년 10월창원부가 마산부로 개편되어 마산부 관할구역이 되었으며, 1912년 1월웅중면 일부와 웅서면을 포함하여 마산부 진해면(웅천, 웅동 제외)으로 개편하였다. 1912년 4월송진포의 일본왜군 진해방비대가 진해로 이전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웅천군이 폐지되어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그 해 11월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마산에서 진해로 이전하였다.
1916년 4월 당초의 군항설치계획이 축소되어 진해요항부(鎭海要港府)가 설치되었으며 1918년 1월에는 웅읍면이 웅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26년창원∼진해간의 진해선이 개통되었고, 1931년 4월 1일진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근대의 인물로서 주기효(朱基孝)는 구국운동과 후진양성에 헌신하였다. 주기용(朱基瑢)은 3·1운동을 주도했고 광복 후에는 교육재건에 공헌하였다. 주기철(朱基徹)은 목사로서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46년 해양경비대가, 1949년 해병대가 창설되면서 이 곳은 해군의 요람이 되었다. 1950년 6·25사변 중 우리나라와 연합군 해군의 기지로서 군사시설이 확장되었으며, 육군 · 해군 · 공군의 교육기관이 이 곳에 집결되었다. 1949년이승만(李承晩)대통령과 중화민국장제스〔蔣介石〕총통의 진해회담으로 1954년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 결성되었다. 1955년 9월 1일진해읍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고, 웅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5년 10월 1일거제군 장목면 유호리의 저도(猪島)와 망와도(望蛙島)가 진해시에 편입되었다가 1993년 12월 1일 환원되었다. 1983년 2월 15일의창군 웅동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고, 1984년 1월 18일웅동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3년 12월 1일에 안곡동의 저도 · 망규도가 거제군에 편입되었고, 1997년 7월 12일에는 웅천출장소 및 웅동출장소가 각각 폐지되었으며, 1998년 9월 14일에 장암동이 풍호동에 편입되었다.
여좌동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는 중완구(보물, 1986년 지정) 등 임진왜란 관련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1575년(선조 8)부터 1605년(선조 38)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완구는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나 오랫동안 바다 밑에 있었기 때문에 부식이 심하여 명문(銘文)을 판독 할 수 없다.
진해시의 주거유적은 청동기시대의 동굴주거지, 삼한시대의 수혈주거지, 삼국시대의 포석주거지가 보고되고 있다. 죽곡동마을 동쪽의 뒷산 계곡에서 청동기시대의 동굴주거지(竹谷洞穴住居址)를 발견하였으나 발견 당시 이미 보존이 어려운 상태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용원패총으로만 알려져 있던 용원수혈주거지(龍院竪穴住居址) 역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자마산 정상에 잇는 집터 유적인 웅천포석주거지(熊川鋪石住居址)는 초석을 깔고 진흙으로 벽을 쌓아 올린 산상주거지이다.
선사시대의 취락지임을 증명하는 패총은 해안을 끼고 있는 지형적 조건으로 인하여 진해지역의 곳곳에 산재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패총으로 추정되는 안골포패총을 비롯하여 웅천패총, 자은동패총, 수도동패총, 여좌동패총, 망산도패총, 용원패총, 마천동패총, 가주동패총 등이 분포하며 삼한 및 가야시대에 형성된 패총이 지배적이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걸쳐 왜구의 침입에 대한 해안방어를 위하여 많은 진영을 설치하고 성을 축조하였던 이 지역에서 많은 관방유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성내동의 웅천읍성(경상남도 기념물, 1974년 지정)은 조선 1434년(세종 16)에 수군첨사영으로 축성한 전형적인 평지성이다. 성문과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고 객사는 최근에 철거되었다. 자은동에 있는 구산성지(경상남도 기념물, 1985년 지정)는 구산의 8부 능선(해발 116m)에 자연암반의 정상부위를 중심으로 비스듬히 둘러서 축조한 테뫼식(山頂式) 석축성이다. 6세기 초에 축조되어 고려 초기까지 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동의 웅천왜성(경상남도 기념물, 1998년 지정)은 남산(해발 184m) 산봉우리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石城)으로 임진왜란 대인 1593년소서행장(小西行長)이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정유재란에 재침하여 개축하였다고 한다.
제포성지(경상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는 1486년(성종 17)에 축조된 재덕동 안지개마을의 낮은 야산 서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정상부로부터 능성을 따라 해안에 이르기까지 축조된 성이다. 완포현 고산성(경상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은 현동 뒷산인 해발 400m의 고산(高山)에 축조된 석축성으로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고 인근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안골동의 웅천안골왜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으로서 일본 수군의 본거지이다. 그 앞바다는 이순신장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쳐부순 안골포해전의 전적지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안골동에는 조선시대 군선의 소박처(所舶處)인 안골포굴강(경상남도 기념물, 1994년 지정)이 있다. 웅천만 해안에는 제포왜관(薺浦倭館)이 있었으나, 1510년 왜관이 폐쇄된 뒤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화랑산 봉수대(경상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는 경상도방면에서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이르는 제2거의 간봉으로서 명동 뒷산인 사화랑산의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다.
진해는 임진왜란 당시 15차례 해전 중 3차례의 해전이 일어난 곳으로 합포, 안골포, 그리고 웅포해전지가 충무공이순신의 호국 성지로서 역사적 의의를 간직하고 있다.
진해시에는 삼한 및 가야시대에 조성된 고분군이 주류를 이룬다. 자마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주능선과 경사부를 따라 넓게 형성되어 있는 웅천고분군(熊川古墳群)에서는 석곽묘의 석재와 개석(蓋石) 등 일부 유구(遺構)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화산지맥의 학산에 분포하는 소사고분군(所沙古墳群)은 가야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민고개 동쪽인 석동의 후사면 능선에 분포하는 석동고분군(石洞古墳群)은 자은동 일대의 패총유적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추정되며 4∼6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통신동에는 1912년에 세운 것으로 당시의 건축양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인 진해우체국(사적, 1981년 지정)이 있다. 러시아풍의 절충식 단층 목조건물인 진해우체국은 1912년에 준공하여 그해 11월 진해우편국이 이전하여 청사로 이용되었다.
199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현동에 있는 고 이승만대통령 별장 및 정자는 과거 일본군통신대가 사용하던 것을 1945년 대한민국 해군이 인수하여 대통령별장으로 사용하였다. 1949년이승만대통령과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이 이곳 육각정에서 태평양동맹결성을 위한 예비회담개최를 필리핀퀴리노대통령에게 제의한 곳으로 현대사적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니는 곳이다.
이외에도 북부동에 위치한 주자정동강당(朱子井洞講堂)은 조선시대 교육을 담당하던 시설로서 주희(朱憙)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影幀閣)과 강당이 있다.
성흥사는 신라 흥덕왕 41년(866)에 지어진 고찰로서 무염국사에 의한 왜구 격퇴에 대한 보은으로 창건된 호국사찰이다. 가람은 1976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성흥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나한전, 삼성각, 범종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상 6주(住), 나한상 16주, 나한도관상 12주, 불상연화대좌 3권, 연화목제대태좌 1권, 당간지주, 무염국사영정(고종 27, 1890년 화주스님 그림)이 모셔져 있다.
용원동에는 망산도 · 유주암 · 유주비각(경상남도 기념물, 1988년 지정)이 있다. 이 곳에 ‘大駕洛國太祖王妃普州太后許氏維舟之地(대가락국태조왕비보주태후허씨유주지지)’라고 쓰여진 석비가 전해진다. 1908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인 맞배지붕의 비각을 세우고 유주각(維舟閣)이라 하였다. 가주동의 청룡대각석(경상남도 기념물, 1997년 지정)은 신라 말의 문장가인 최치원 선생이 낚시를 즐기던 곳으로 ‘靑龍臺 致遠書(청룡대 치원서)’라고 음각되어 있다.
진해시 용원동 일대 해안에는 낙동강 하류 철새 도래지(천연기념물, 1966년 지정)가 걸쳐 있으며, 지금은 갈매기와 오리과의 새들이 주로 찾아들지만 130종 이상의 조류가 관찰 · 기록되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문종 때 웅천현이 설치되면서 향교가 설립되었고, 그 뒤 양사재(養士齋)가 생겨서 한말까지 존속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6년웅천에 사립 개통학교(開通學校)가 설립된 것을 시초로 1908년안골에 경명학교(競明學校), 1912년웅동에 계광학교(啓光學校), 1918년 지금의 수도동에 사립 문성학교(文成學校)가, 1922년 지금의 연도동에 사립 삼계학교(三計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이후 이 학교들은 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하였다. 2009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유치원 34개 교, 초등학교 19개 교, 중학교 9개 교, 고등학교 6개교가 있으며, 창원전문대학 진해분교 · 해군사관학교가 있다.
1952년 이순신동상 제막에 따라 이순신의 얼을 추모하기 위한 추모제가 거행되어오다가 1963년부터 종합문화행사로 거행되고 있는 군항제(軍港祭)는, 진해시의 범시민적 행사로서 벚꽃이 만개하는 4월에 열린다.
2006년 현재 종교기관은 불교사찰 39개, 개신교교회 81개, 원불교교당 1개, 천주교성당 7개, 천리교교회 33개, 기타 7개가 있다.
진해시의 대표적 민속놀이로는 진해농악과 연도(椽島)의 「상엿소리」놀이를 들 수 있다. 진해농악은 행진악 · 무용악 · 축악 · 제신악(祭神樂) 등의 악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락은 주로 자진모리를 쓴다. 구성원에 무동과 말뚝이가 있음이 특색이다.
또 진해시에서 4㎞쯤 떨어진 곳에 연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이 곳의 장례풍습은 그 고유의「상엿소리」와 함께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어 1984년진해문화원에서는 이것을 놀이로 엮어 발표한 바 있다.
이 섬은 어업을 주요 생계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수개 월 바다에 있게 되므로 그 동안의 장례는 여자들에 의해 치러진다. 섬의 면적이 작아 공동묘지는 이웃하여 있는 솔섬[松島]에 마련되어 있다. 장례의식은 빈 상여를 메고 동네를 도는 하직인사, 발인제, 상가에서 도보로 선창까지 운구하고 장지인 솔섬까지 배로 운구하는 절차로 되어 있다. 특히 특유의「상엿소리」가 보존되고 있으므로 음악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이 밖에도 윷놀이 · 연날리기 · 널뛰기 · 그네뛰기 · 씨름 · 닭싸움 · 소싸움 등이 전승되고 있다.
마을공동제의로서는 성황제 · 산신제 · 용왕제 · 풍어제 · 수신제 · 기우제, 당산제 등이 있으며 웅상산신제, 장복산산신제, 용원용왕제 등이 대표적이다. 제덕마을, 안골마을, 두동마을, 소사마을, 삼포마을, 연도마을, 수도마을, 괴정마을, 와성마을, 사도마을, 백일마을, 명동마을 등 기존 자연부락을 중심으로 당산제는 행해진다.
이 고장에는 장천동 뒤편에 있는 천자봉(天子峯)과 명나라 태조주원장(朱元璋)에 얽힌 지명 · 인물 전설이 다수 전해오고 있다.
옛날 천자봉에 있는 못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았는데, 성질이 포악하여 인근 주민들을 괴롭혔다. 이에 염라대왕이 꾀를 내어 “용이 못될 바에야 차라리 인중룡(人中龍)인 천자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하였다. 이무기는 스스로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육신을 버리고 파랑새로 변하여 못 아래 백일마을의 주씨(朱氏)가문으로 들어가 아기로 태어났다. 이 아기가 뒤에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 태조가 되었는데, 이 전설에 연유하여 이 곳에 천자암(天子巖) · 장군천(將軍川) · 장천동(將川洞) · 자은동(自隱洞)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 다른 이야기로는 함경도 사람 이씨가 하인 주씨를 데리고 명당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마침내 천자봉에 이르렀는데, 그 곳에서 굽어보니 갑자기 바다에서 반인반어(半人半魚)의 괴물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바다에 굴이 둘 있는데 오른편이 천자가 날 명당이다.”라고 하고는 사라졌다. 하인 주씨는 이 말을 듣고 욕심이 나서 자기 선친의 유골을 오른편에 묻고 주인 이씨의 유골을 왼편에 묻었다. 이로 말미암아 후에 주씨 가문에서는 명나라 태조가 나고 이씨문중에서는 이성계(李成桂)가 났다고 한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신라 혜공왕 때 법조선사(法照禪師)가 밀양 무봉사(舞鳳寺)를 창건할 때 호랑이가 변신해서 된 나비의 인도로 천자봉에 이르러 그 산밑에 있는 백일마을의 한 노부부 집에서 갓난아이를 데려오게 되었다. 선사가 정성껏 가르치니 아이는 지용(智勇)이 뛰어나게 자랐다. 이상하게도 그는 왼손을 늘 움켜쥐고 있는 것이었다. 선사가 이상히 여겨 잠든 사이에 그의 왼손을 펴보니 세 글자와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잠을 깬 아이는 노하여 선사의 뺨을 때리고 중국으로 가서 명나라 태조주원장이 되었다. 천자봉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로 곽석골의 배생원이 나무하러 천자봉에 올라갔다가 백발노인이 장기 두는 것을 도낏자루를 지팡이 삼아 구경하다가 세월이 흘러 백발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 밖에도 가난한 집의 수수를 훑어갔다가 법사의 꾸지람을 들은 중이 3년간 그 집에서 일을 해주다가 바위와 함께 사라졌다는 「갈바위전설(行巖傳說)」,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부엉산 산신령전설」, 남매의 정이 스민 「마야령전설(馬也嶺傳說)」, 신화적 요소를 지닌 「대홍수와 사람의 시조이야기」, 가락국수로왕의 비 허씨가 아유타국(阿踰陀國)으로부터 돌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매어놓은 배가 뒤집힌 것이라는 「유주암 전설」 등이 전한다.
이 고장의 민요는 경상남도 일원의 것과 유사하다. 논농사와 관련된 「모찌는 노래」 · 「모심는 노래」 · 「논매는 노래」가 전승되고 있다.
「모심는 노래」는 오전, 오후, 점심 때, 해질 무렵 등 때에 따라 그 사설과 빠르기가 조금씩 다르다. “더디다 더디다 점심이 더디다/미나리 챗국에 맛본다고 더디나/머리좋고 실한처녀 줄복○에 걸앉았네/줄복갈복 내다주마 백년언약 내다주마……”처럼 점심 오기를 재촉하는 점심 때의 노래가 있다. 또 해가 서산에 걸릴 즈음에 하루의 노동을 정리하는 보람에 찬 노래를 할 때는 일손이 바삐 움직이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해다지고 저문날에 우연수자 울고가네/어린동생 아브시고(앞세우고) 잘데없어 울고가네/……논두렁밑에 가재야 해다졌다 나온나/오신도신 놀다가 해다진줄 몰랐네.”「모심는 노래」 중 진해의 지명이 들어가는 “저기가는 저구름은 어데신선 타고가노/웅천하고 천자봉에 노던신선 타고가네.”와 같은 대목도 있다.
「지신밟기소리」는 대문 · 부엌 · 마루 · 장독 · 외양간 등에서 복을 비는 의식요로서 주로 정월대보름에 한다.「장독지신풀이」의 한 대목을 들어보면, “어여라 장독아/장독지신을 울리자/……진주남강에 물을실어/창원덕산에 소금을담아/한독에는 된장을 담고……”와 같다. “시집온 삼일만에……”, “성아성아 사촌성아……”등으로 시작되는 「시집살이노래」는 인물과 사건이 배치되어 줄거리를 구성하는 서사민요가 많다. “시집온 삼 일만에 가사구경 하옵다가 은잔하나 깨었다네/백실같은 시부님이 문을열고 척나서며/아래온 며늘아가 너의친정 자주가서/논밭전체 팔재라도 은잔하나 물어온나……”처럼 시집가서 당하는 서러움을 읊은 노래 등이 많이 전한다.
이 밖에 후렴구가 ‘치기나칭칭나네’인 「쾌지나칭칭나네」 · 「미나리타령」 · 「나물노래」, 그리고 재치있고 재미있는 많은 동요가 전해진다. 또, 집을 떠날 때의 후렴은 “나무아미타불”이고, 장지로 갈 때의 후창은 “에헤홍 어헤홍 에가리넘차 에헤홍” 하는 「상엿소리」가 있다.
진해시의 경제활동은 군사도시적 특성으로 인해 마산과 창원에 연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7년 비료공장인 진해화학이 들어선 것 외에는 공업 발전이 지체되었다. 그러나 1989년 해군기지법이 완화되면서 고층화가 가능하게 되어 진해공단, 마천주물공단 등 국가공단이 조성되었으며 녹산공단조성에 따른 용원지구의 공장용지개발도 이루어졌다. 현재 동북아 물류 중심항으로서 신항만 건설사업을 추진 중에 있으며,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지정으로 물류거점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농업생산은 시의 외곽지역에서 주로 행해지는데 약간의 논농사와 주로 근교농업적 성격의 밭농사가 특징을 이루고 있다. 2008년 현재 총경지면적은 893ha이며 이 중 논이 452ha, 밭이 441ha로서 논밭의 구성비는 논이 50.6%, 밭이 49.4%로서 거의 유사하나 논이 밭보다 약간 우세하다. 이들 경작은 주로 시의 북쪽 산록지역과 기타의 외곽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시의 농가호수는 902호, 농가인구는 2,720명으로서 1961년 이후 감소추세를 나타내며 특히 진해시의 개발이 본격화되는 2001년 이후 급격한 감소를 보이고 있다.
양호한 항만조건을 이용하여 수산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이 지역의 수산인구는 6,677명으로 경상남도 수산인구의 16%를 차지한다. 약 1,100여 척의 어선이 높은 어획고를 올리며 멸치 · 가자미 · 대구 · 고등어 등이 주요 어종이다. 그러나 부근 수역의 빈번한 적조현상과 바다의 오염으로 근해어업은 점차 사양화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일찍이 진해에서는 농업 · 어업 · 광업을 기반으로 하는 공업이 전개되어 왔으며 최근 마산과 창원 등 인근지역의 공업이 외곽으로 확산되면서 진해시의 제조업체는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8년 현재 제조업체 수는 580개이며 총 종사자수는 11,164명이다. STX조선(주)과 (주)신동방진해공장 등이 주요 제조업체 이다.
제3차 산업에 속하는 상업 및 서비스업 부문의 경우를 보면, 총사업체 수 8,546개에 2만9,192명이 고용되어 있다. 한편, 상업활동은 1개의 대형마트, 6개의 등록시장이 있다. 정기시장은 경화동의 경화장이 3·8일, 웅천동의 웅천장이 4·9일, 성내동의 마천장이 5·10에 열리고 있다.
진해시는 1910년 군항개설에 따라 육상교통의 필요성에 의해 철로와 도로를 개설 하였는데 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망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진해시는 1910년 군항개설에 따른 교통의 필요성에 따라 시내의 계획적인 방사상 도로망을 비롯한 육상교통이 발달하였다.
진해 · 창원간 안민고개의 도로가 1912년에 개설되었으며 1942년에 착공된 마진터널은 중단되었다가 1966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1985년에 완공된 장복터널은 진해 · 마산 · 창원을 잇는 연계적 도시기능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진해 · 부산간 국도 2호선의 4차선 공사가 2002년에 마무리됨으로써 이 지역에의 접근성을 크게 높이고 있다. 2006년 현재 일반국도 23㎞, 시도 172㎞로서 이는 총 도로연장의 각각 12%와 88%에 해당한다.
진해항을 통해 들어온 군용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건설된 진해선(鎭海線)은 1926년부산철도연대로 편입되어 일반영업을 시작하였다. 진해역을 기점으로 현동선(縣洞線), 해병선(海兵線), 사비선(四肥線)이 있는 데 사비선은 행암선(行岩線)으로 분기된다. 철도역으로는 진해역과 경화역이 있다.
진해시는 우리나라 유일의 군항 관광도시이자, 해군의 요람이다. 도시 전체가 잘 다듬어진 공원으로 중원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뻗은 방사상의 가로망과 도시미화를 위해 심은 벚나무로 장식된 가로수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으뜸가는 관광자원이다.
특히, 매년 4월에 열리는 군항제의 벚꽃축제 때는 온 시가지가 화사한 벚꽃 숲에 뒤덮여 수십 만의 상춘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룬다. 시내 중심에 자리 잡은 제황산공원에 오르면 아름다운 벚꽃 숲 시가지와 평화스러운 진해만의 다도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북원로터리에 건립된 이순신동상도 관광명소 중의 하나이다. 나라와 민족을 구한 늠름한 자세로 남해를 지켜보고 서 있는 이 동상은 조국에 대한 사랑과 우리 해군의 용감무쌍한 감투정신을 심어 준다. 군항제 동안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는 북원 로터리와 해군통제부 사이, 남원 로터리와 해군사관학교 사이, 진해시와 창원시를 연결하는 마진국도간은 벚꽃터널로 장관을 이루어 해마다 2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이 기간 동안 다녀간다.
이 밖에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진해탑 · 장복산공원 · 에너지과학공원 · 웅천도요지 · 안골왜성 · 진해파크랜드 등이 있다. 관광호텔을 비롯하여 각종 숙박시설이 완비되어 있고 해상 · 육상의 교통이 편리하며, 마산 · 창원 · 부산 등 인접한 도시가 많아 관광객이 많다. 2004년 현재 진해를 찾은 관광객 수는 295만 2,521명이며 이 중 내국인이 99.4%를 차지한다.
제황산동의 진해시립박물관은 1998년에 개관하였으며 제황산 공원내의 진해탑층에 전시실, 시청각실, 유물창고, 전망탑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앵곡동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은 1976년에 건립되어, 신증축을 거쳐 1990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충무공이순신의 애국정신과 해전활약상, 선조들의 해양활동 역사 등과 관련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명동의 진해해양공원은 남해안관광밸트사업의 일환으로 해군본부로부터 무상임대한 퇴역함(강원함)을 활용하여 건립한 해양관광도시의 기상을 고취시키는 역사문화교육 및 체험의 장이다.
벚꽃이 만발하는 3월말에서 4월초에 매년 열리는 군항제는 1963년부터 개최되었으며 충무공의 얼을 추모하고 향토문화예술을 진흥하는 문화예술행사, 관람행사, 팔도풍물시장 등으로 이루어진다. 김달진문학제는 이 고장 출신의 시인인 김달진을 기리기 위한 문학행사로서 1996년에 시작되었다. 진해예술제는 매년 10월 경에 열리며 이 지역문화예술단체들이 수준 높은 예술공연을 선보인다.
진해시에는 종합경기장 1개소, 실내체육관 3개소, 테니스장 4개소, 수영장 2개소가 있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해변골프코스를 갖춘 용원컨트리클럽은 주변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 진해시의 대표적인 스포츠시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