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용원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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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삼한의 집터 관련 조개더미. 주거지.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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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용원패총, 진해 용원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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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삼한의 집터 관련 조개더미. 주거지.
내용

한국토지공사에서 시공 중인 녹산공업단지(菉山工業團地) 조성구역 내에서 패총 유적이 발견되어, 1994년 3∼4월과 7∼12월 두 차례에 걸쳐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유적은 주로 해안에 돌출된 독립 구릉(해발 26m) 정상과 남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패총이 형성될 당시에는 구릉 아래까지 해수면이 다달아 마치 반도와 같은 지형을 이뤘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동쪽과 남쪽은 바다와 대면하고, 북쪽은 불모산(佛母山) 남쪽 기슭과 연결된다. 서쪽은 안골포(安骨浦)와 연접하고 있으나 역시 유적 형성 당시에는 바다와 경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유적으로 구산(龜山)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이 있다. 또한 웅천(熊川)·웅동(熊洞) 등지에는 허황후(許皇后) 전설이 남아 있는 용원 망산도(龍院望山島)와 성곽과 패총 및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자마산(子馬山)이 있다.

발굴조사 결과, 구릉 정상부에서는 수혈주거지를 포함한 각종 수혈(竪穴)과 주혈(柱穴)유구가 확인되고, 구릉 남사면에서는 패각이 깊이 퇴적된 패총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나 건물지로 파악되는 유구는 그 평면형태가 원형에 가까운 것이 16기, 방형이 5기, 주혈(柱穴)만 남긴 고상건물(高床建物)로 추정되는 것이 4기이다. 나머지 수혈 유구들은 저장혈(貯藏穴)의 상면(床面)이나 특수용도로 사용하다가 폐기시킨 유구 상면의 잔존부분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분포양상은 구릉 정상부에 주거지가 주로 밀집하고, 남사면과 그 주변에 저장혈과 같은 특수용도의 대소주혈 상면부분이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가 방형이나 장방형인 것은 구릉 서쪽에 분포하고, 원형인 것은 중심부에, 고상건물은 동쪽에 배치되어 있다.

규모는 10㎡ 이하인 것이 5기, 20㎡이하인 것이 2기, 30㎡ 이하인 것이 9기, 40㎡ 이하인 것이 3기, 그 이상인 것이 2기이다. 노지(爐址)는 상면 중앙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하는 것이 많았다.

출토유물은 토기편이 대부분이고, 철기편과 석기편들도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들은 유구 내부에서 직접 출토되었거나 대부분 당시에 직접 사용하던 것이 아니고, 주거지 폐기 후 주변에 있던 것이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중 적갈색토기나 회청색토기의 특징은 주변지역과의 문물교류 이해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일본 구주(九州)지역 토기와의 유사성은 주목할 만하다.

이 주거지의 중심 연대는 3-4세기로 추정된다. 이 주거지는 규모·형태·구조·분포상태 등의 제반 특징이 청동기시대와 유사하며, 사회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세력집단이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출토유물의 특징이 삼한시대의 문화내용이 주종을 이루지만, 그 중에서도 농경보다 어로 중심의 생산구조를 가지면서 일본과도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어 주목되고 있다.

패총의 층위는 정상부를 중심으로 비교적 정연하게 퇴적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래쪽으로 갈수록 교란현상이 심하다. 패각층은 전체적으로 정상부에서 아래쪽으로 점차 덮여 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정상부에 가까운 것들이 시기적으로 먼저 퇴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교란된 퇴적층의 두께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두껍게 나타났다.

층위는 모두 15개로 구분된다. 그 구성은 대부분 패각류가 중심이 되지만 점토층(粘土層)과 소토층(燒土層)도 있다. 출토유물은 토기편들과 갈돌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둥근 역석(礫石)이 있고, 패각(貝殼)은 굴껍질이 주종을 이루고 작은 고동종류도 많았다.

이 패총의 연대는 회청색경질승석타날문토기문화(灰靑色硬質繩蓆打捺文土器文化)가 정립된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패총의 최하층인 소토층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는 타날문토기는 김해 회현리 패총·부원동 패총, 고성 동외동 패총, 마산 성산 패총 등 삼한시대 남해안 패총 유적과 거의 동일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연대는 1-2세기경에 형성되어 4세기 후반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패총의 성격은 위치상 낙동강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김해지역의 패총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그 비중이 매우 컸다. 또한 출토유물 중 외래계적인 요소, 즉 일본의 토사기(土師器)와 관련되는 것들이 일부 나타나고 있어, 해상교역로의 입구에 위치하는 그 역할을 짐작해볼 수 있다.

참고문헌

『진해용원유적』(한국토지공사·동아대학교박물관, 1996)
집필자
문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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