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창절사는 장릉경내에 건립하였던 육신사(六臣祠)에서 비롯되었다. 1685년(숙종 11) 강원도관찰사 홍만종(洪萬鍾)과 영월군수 조이한(趙爾翰)이 3칸의 사우를 세웠는데, 1698년 노산군에 대한 복위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면서부터 왕릉 곁에 신하들의 사당을 둘 수 있느냐가 논란이 되면서 1705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이 후 1709년영월 유생의 소청으로 ‘육신사(六臣祠)’를 ‘창절사(彰節祠)’로 고쳐 사액(賜額)을 내렸다. 당초에는 사육신만이 배향되었으나 창절사로 사액되면서 이후로 김시습과 남효온 · 박심문 · 엄흥도가 추가로 배향되었으며, 창절서원(彰節書院)으로 개칭되었다.
현재 서원에는 2층 누문(樓門)인 배견루(拜鵑樓)가 정문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彰節書院”이라 현액(懸額)된 강당이 있으며, 그 뒷쪽으로 내삼문을 거쳐 들어가면 창절사와 동 · 서무(東 · 西廡)가 있다.
내삼문에는 예전의 ‘六臣祠’ 현판이 걸려 있고, ‘창절사’ 현판은 1709년 윤사국(尹師國)이 쓴 것이다. 이곳의 건물은 1788년(정조 12)의 대대적인 보수를 비롯하여 그뒤 여러 차례 중수와 보수를 거쳤다. 매년 봄 · 가을에 제향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