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부터 실시한 중원문화권 조사계획의 일환으로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가 1991년과 1992년에 2차례 발굴조사하였다. 1991년 조사한 ‘가’지구는 문의국민학교 뒷편 야산에 동서로 뻗은 구릉의 정상을 따라 있다. 1992년 조사한 ‘나’지구는 6구마을의 남쪽 약 50m에 자리하고 있는 동북방향의 구릉상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결과, 총 14기의 돌덧널무덤〔石槨墓〕을 확인하였다. 이들 돌덧널무덤은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와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 돌덧널무덤의 세벽만을 쌓고 한쪽 벽으로 출입한 후, 마지막으로 밖에서 벽을 쌓아 마무리하는 무덤형식〕으로 구분한다.
구덩식돌덧널무덤의 무덤방은 남향이며, 지형상으로 볼 때 구릉의 경사면과 직각을 이룬다. 평면형태는 가늘고 길며, 규모는 길이 5m, 폭 1m 전후이다. 천장구조는 정확한 상황을 알 수 없으나, 여러 개의 판석을 돌덧널 위에 걸쳐서 천장을 구성하였을 것이다.
바닥은 돌을 깔거나 맨흙를 이용하였고, 바닥면 북쪽 부분에는 시상대(屍床臺)를 설치하였다. 시상대는 긴 네모꼴로 높이 30∼40cm 정도로 높은 편이며, 아랫단을 괴석으로 축조하고 상면은 강돌을 깔아서 고르게 하였다. 시상대와 벽면 사이의 공간은 유물을 매납하는 부장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유물로는 시상대 위에서 장신구와 철기류가, 바닥에서 토기류가 주로 출토하였다.
앞트기식돌덧널무덤은 ‘가’지구의 1호와 5호, ‘나’지구의 1호와 3호가 대표적이다. 4기 모두 돌덧널 아랫부분 1∼2단 정도만 남아 있다. 무덤덧널이 지상에 마련되어 있는 점이 구덩식과 비교해볼 때 뚜렷한 특징이다. 평면형태는 ‘ㅂ’자 모양으로 무덤 안쪽의 단벽을 마련한 후 입구를 막았다. 바닥은 관대(棺臺)의 설치가 확인되지 않았고, 각진 돌을 전면에 걸쳐 한두 겹 깔았다.
유물로는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을 출토하였다. 특히 회청색경질굽다리접시나 뚜껑굽다리접시의 기본적인 성격이 경주지역 출토 토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장신구도 신라의 문화적인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또한 신라의 상위지배층의 무덤에서만 보이는 도끼형 철촉을 출토하고 있어 신라의 무덤임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미천리고분군은 당시의 역사적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신라가 자비마립간 17년(474)에 이 지역을 점령하여 일모산성(一牟山城: 현 양성산성)을 쌓았다는 역사적 기록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나왔다. 즉 신라계 굽다리접시, 굽다리긴목항아리, 다수의 철기류, 금제태환이식과 같은 장신구류 등이 총 14기의 돌덧널무덤에서 출토하였다.
유적의 연대는 구덩식돌덧널무덤에서 앞트기식돌덧널무덤으로 넘어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로 추정한다. 역사기록을 통해서도 5세기 후반 이 지역의 주인은 신라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6세기경까지도 계속되어 이 일대가 고구려의 남하 이후에도 신라영역으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 고분군과 인접한 양성산성의 존재를 통해 이 지역이 5세기 후반 신라의 영토가 된 뒤, 서북방 진출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이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남양만에 당항성(黨項城)이란 요새를 쌓아 이를 거점으로 중국의 남북조와 외교관계를 공고히 하게 된 것도 이 지역의 점거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