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편찬하였다. 그의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이다. 1447년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후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농촌 사회의 일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촌담해이(村談解頤)』도 그의 관심이 표출된 한 사례다.
현재 『촌담해이』 이본은 유인본(油印本), 서울대본, 고려대본, 연세대본 등이 있다. 모든 이본에는 강희맹의 서문이 있다. 하지만 수록된 작품 수는 이본마다 다르다. 유인본에는 10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고려대본에는 4편만 실려 있다. 고려대본에 실린 네 편, 즉 「모란탈재(牧丹奪財)」ㆍ「치노획첩(痴奴獲妾)」ㆍ「청부독과(菁父毒果)」ㆍ「계경주지(繫頸住持)」는 원래의 『촌담해이』에 수록되어 있었음이 확실하다. 유인본에 실려 있는 나머지 6편은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강희맹이 쓴 서문에 따르면, 『촌담해이』는 한가하게 집에 있을 때 시골 노인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강희맹의 집에 온 손님이 책을 두고 논쟁하는데, 그 과정에서 『촌담해이』에 실린 작품 9편의 대강을 알 수 있다. 손님은 강희맹에게 9편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는가[其爲敎也奈何]를 묻자, 강희맹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이는 자신의 몸을 지키고 집안을 바로잡는 것을 넘어 천하의 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일상의 실천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 할 만하다. 이 중 모든 이본에 실린 4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이들 작품 뒤에는 모두 강희맹이 논평을 붙여 의론을 펼쳤다.
한편, 유인본에는 이 4편 외에 6편이 첨가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나머지 여섯 작품은 ⑤「서입기혈(鼠入其穴)」, ⑥「칭의취농(稱醫取膿)」, ⑦「비승어양(鼻勝於陽)」, ⑧「양물유후(陽物有垢)」, ⑨「신승고표(神僧藁俵)」, ⑩「귀봉변괴(鬼棒變怪)」이다. 이 작품들은 강희맹이 자서(自序)에서 말한 내용과 거리가 있는데, 주로 농도 짙은 음담이 위주이다. 또한 위의 4편과 달리 논평도 없다. 이러한 이유로 유인본에 실린 6편을 후대에 첨가된 작품이라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