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산수화의 대가인 안견(安堅)과 병칭되었다. 세종 때에 화원(畫員)이 되었으며 성종 때에 가장 이름을 날렸다.
본래 경기도 안산에서 소금을 굽는 염부(鹽夫)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며, 도화원(圖畫院) 생도가 되어 화업(畫業)에 정진한 끝에 도화원별좌가 되었다.
또한, 성종 때에는 소헌왕후·세조·예종·덕종의 어용(御容)을 성공적으로 그려 화원으로서는 최초로 당상관에 제수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기도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의 반대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어용·불상·인물 등의 그림에 있어서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며, 또한 허세를 부리고 과시적인 성격을 지녔었기 때문에 승진을 거듭하기도 하고 도화원에서 파직되어 매를 맞고 관노(官奴)가 되기도 하는 등 파란이 많은 생애를 살았다.
주로 도화서의 동료인 안귀생(安貴生)·배련(裵蓮)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 등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에 그의 이름이 적힌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한 점 전해지고 있으나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