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치명(穉明), 호는 감재(憨齋).
철종조를 중심으로 활동한 여항시인(閭巷詩人)으로 신분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서리였던 유재건(劉在建)·이경민(李慶民) 등과 어울렸던 것으로 보아 중인이거나 서리일 것으로 추정된다. 최경흠에 관한 유일한 문헌인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따르면 학문에 열중했으며, 후진을 교육하는 것으로 일생의 일을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생애를 특징짓는 것은 여항문인으로서의 활발한 활동이다. 원래 시문에 능하였던 그는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계(蘭亭稧)를 모방했다.
종래의 여항시사(閭巷詩社)의 전통을 이어 1853년(헌종 1) 유재건·조희룡(趙熙龍)·이경민 등 당시의 저명한 여항시인들과 함께 직하시사(稷下詩社)를 결성해 여항문학의 말기를 장식하였다. 여항시인으로서의 그의 업적은 『풍요삼선(風謠三選)』의 발간과 『소대풍요(昭代風謠)』의 중간으로 요약된다.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들은 1737년(영조 13) 그들의 시작(詩作)을 수습하여 『소대풍요』를 간행하고, 1797년(정조 21)에 『풍요속선』을 간행하였는데, 『풍요속선』 이후의 여항문학의 성과를 그가 주축이 되어 『풍요삼선』으로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대풍요』가 거의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겨 다시 100여부를 중간했다. 그의 업적은 조선 후기 여항문학의 성과를 정리한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