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대(子大).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부사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형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곧 승문원에 들어간 뒤 성균관전적·직강·사예를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좀 뒤늦게 홍제원(弘濟院)으로 달려가 김류(金鎏) 등 문신·무신 200여 명과 함께 창의문(彰義門)을 넘어가 궁성을 지킨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장악원정을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고 완천군(完川君)에 봉하여졌으며 한성부의 좌우윤, 형조와 공조의 참판을 지내고, 1630년(인조 8) 장흥부사로 부임,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어 청주·능주의 목사를 역임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다시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1645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자되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배수하였다. 2년 후 경기감사, 1649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