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진(子眞). 호는 충재(忠齋). 최유량(崔有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저(崔渚)이고, 아버지는 최철중(崔鐵重)이며, 어머니는 이계손(李繼孫)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진사로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96년(연산군 2)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고 수찬·지평·헌납 등을 지냈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연산군이 생모에 대하여 상복을 다시 입으려 하자, 이행(李荇)과 함께 이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그 소의 글귀가 문제되어 신계(新溪)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그해 9월에 응교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1508년(중종 3)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장원하였다.
그 뒤 대사간·대사헌을 지내고, 1518년 우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를 거절하자 파직되었고, 곧 판중추부사로 복직되었으나 이 해 기묘사화로 다시 파직되었다. 저서로는 『충재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