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일은 일제강점기 「아내」, 「떠나가는 날」, 「그 여자」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연극인이다. 1901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아호는 추곡이다. 1920년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극 연극단체인 ‘극예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소설 「떠나가는 날」을 『신여성』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하자 입사해 1936년까지 방송극을 연출했다. 1939년 동아영화제작소를 창립했으며, 1941년 지원병 입대를 홍보하는 영화 『지원병』을 제작했다. 1946년 동생 최승희 부부와 함께 월북했다.
1901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아호는 추곡(秋谷)으로, 고전무용가 최승희(崔承喜)의 오빠이며, 부인은 배우 석금성(石今星)이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에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미학과에서 수학했다. 일본 유학 때 나중에 매부가 된 안막(安幕)과 함께 프로문학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연극 활동에 열중했다. 1920년 봄 유학시절 도쿄에서 유학생들과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극 연극단체인 ‘극예술협회’ 창립에 참여했다. 1922년에는 김우진(金宇鎭)·조명희(趙明熙)·유춘섭(柳春燮) 등과 함께 귀국하여 각 지방에 순회공연을 다녔다.
귀국 직후 1922년 조선의 연극을 개량하기 위해 극문회(劇文會)를 창립했으며, 연극·드라마·소설 등 다양한 문예활동을 했다. 1923년 사회주의단체 북성회(北星會)에 참여했으며, 이해 소설 「떠나가는 날」을 『신여성』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24년 송영·심대섭·지정신 등과 함께 사회주의 예술단체인 염군사(焰群社)를 조직했으며, 1925년 8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2월에는 위원, 1928년 7월에는 전국대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12월 경성청년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집행위원, 1925년 9월에는 출판부 집행위원, 1926년 2월에는 기관지 『청년의 성(聲)』 편집부 사원으로 활동했다. 이해 6월에는 이경손과 함께 라디오드라마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선무선방송에서 국내외 연극 방송을 소개했다. 12월에는 문예운동사 주최 문예대강연회에서 방정환 등과 같이 강연을 했다.
1927년 2월 경성방송국이 개국하자 입사해 1936년까지 근무하면서 방송극을 연출했다. 경성방송국에 입사했다는 이유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제명되었다. 1930년 9월 연출한 「산」을 미나도좌에서 상연했다. 이 무렵을 전후해서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했으며, 연극에 관한 시평적 글 「연극의 기업화」(조선일보, 1935.7) 등을 발표했다. 1937년 경성방송국을 그만두고 동생 최승희의 귀국공연, 1938년 1월 장혁주 극본 「춘향전」 전국 순회공연을 기획했다. 1939년 동아영화제작소를 창립했으며, 1940년 5월 영화인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 지원병 입대를 홍보하는 영화 『지원병』을 제작했다. 1944년 동생 최승희의 중국 공연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중국 공연 중 해방을 맞았으며, 1946년 2월 귀국했지만 일제협력 등 여러 가지 상황이 좋지 않자 동생 최승희 부부와 함께 7월 월북했다. 북한에서 박미성과 더불어 정상급 시인대우를 받았다. 소설작품으로 「아내」(신여성, 1924.6)를 비롯하여 「떠나가는 날」과 그 속편인 「그 여자」(신여성, 1924.8.10)·「김천지의 죽음」(매일신보, 1924.12.7)·「바둑이」(개벽, 1926.2)·「봉희(鳳姬)」(개벽, 1926.4)·「홍한녹수(紅恨綠愁)」(매일신보 1926.11.14)·「경매」(별건곤, 1926.12)·「콩나물과 소설」(별건곤, 1927.1)·「이 살림을 보아라」(매일신보, 1927.1.1)·「죄」(별건곤, 1927.2)·「종(鍾)이」(조선지광 1929.1)·「거리의 여자」(대조, 1930.5)·「누가 익이었느냐?」(대조, 1930.8)·「방랑소경,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조선중앙일보, 1933.11) 등이 있다. 1966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