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휘숙(輝叔). 호는 폄재(砭齋). 남원 출신. 아버지는 사간 최상중(崔尙重)이며, 증이조판서 최연(崔薀)의 아우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전횡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은퇴하여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능참봉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 형 최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해산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도 이흥발(李興浡)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639년 이조판서 이경석(李景奭)의 천거로 비안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644년 형조좌랑을 제수받고도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비로소 사업(司業)이 되었다가 이듬해에 사직하고, 1653년(효종 4)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재행(才行)과 학식을 겸비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여 언관(言官)의 직책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