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0년(선조 13)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월관첨절제사(月串僉節制使) 이빈(李蘋)과 함께 여산에서 적군의 진출을 막아 싸웠다.
김천일 등과 함께 남원·순창을 거쳐 북상하던 중 군사 4만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여 떠났던 전라감사 이광(李洸) 등 많은 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뒤라 수원에서 강화도로 들어가 주둔지로 삼고 군사를 모집하였다.
한편으로는 한강 연변지역을 왕래하면서 적의 후방을 공략하고 해상으로 의주에 있는 행재소(行在所 : 임금의 임시 주재처)와도 연락을 취하였다. 이듬해 영덕(永德)으로 나가 왜군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참획(斬獲), 그 공으로 상호군에 승진되었다.
1596년 황해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중앙으로 들어와서 한강 수비의 소임을 맡았다. 즉 그 해 후위대장(後衛大將)이 되어 전위대장 조경(趙儆)과 함께 훈련도감 군사를 거느리고 수도방위의 책임을 맡았던 것이다. 왜란이 평정된 뒤 1600년에는 동지중추부사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