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보신(寶臣). 호는 수재(睡齋). 최원량(崔元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안린(崔安獜)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최치운(崔致雲)이며, 어머니는 현령 함화(咸華)의 딸이다.
1448년(세종 30)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로 보직이 되었는데,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강릉훈도를 자원하여갔다. 그 뒤 저작·박사·전적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462년(세조 8)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어 1년 만에 양친(養親)하기 위하여 사퇴하였다.
그 뒤 고성·영월 두 고을의 군수를 역임할 때 선치하였으며, 만기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성균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1483년(성종 14) 대신의 천거로 집의가 되고 이어 예빈시(禮賓寺)·봉상시(奉常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이어 송도에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옥사가 있었는데 그가 파견되어 명석하게 해결하여 상으로 안마(鞍馬)를 받았다. 1487년 호남의 수적(水賊) 10여인을 잡은 공으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를 지내고 충청도감찰사에 임명되었다.
1489년 대사헌, 1491년 경주부윤, 1494년 한성부좌윤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금의 뜻을 거스른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500년에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고, 1505년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늙었다는 이유로 사임하자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며,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