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에는 평양의 서성리교회에서 청년단을 조직하고 상해(上海)로부터 몰래 들어온 선우 혁(鮮于爀)과 함께 평안남도내에서 군자금을 거두어 상해로 전달하였다.
그 해에 만주로 건너가 삼원보(三源堡)에서 독립군의 군사훈련교육을 받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은 이근수(李根洙)와 함께 국내로 들어와 평양에서 8인결사대를 조직, 무력항쟁으로 일제에 대항할 것을 약속하였다.
1920년 5월 초순 평양경찰서를 폭파하기로 하고 동지들과 모의하던 중 밀고에 의해 5월 9일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감형되어 1925년에 출감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