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이 서경(西京)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묘청을 토벌하였고, 이듬해 서경의 적이 항복하자 김부식의 명을 받고 어사로서 부고(府庫)를 봉하였다.
1144년 금주(金主)가 동경(東京)에 행차하였다는 소식이 있자, 호부시랑으로서 동경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였다. 1151년(의종 5) 간관들이 시사(時事)를 3일 동안이나 간하였으나 회보가 없자, 성재(省宰)가 모두 죄를 청하고 일을 보지 않았다.
이에 왕이 문공원(文公元)·유필(庾弼)·김영석(金永錫) 등과 함께 나와서 일을 보게 하였지만 모두 조칙(詔勅)을 받지 않았다. 그 뒤 다시 문공원·유필 등과 함께 대령후(大寧侯)와 정서(鄭敍)를 탄핵하여 동래로 유배하였다. 1155년 평장사(平章事)로서 국정을 자문하고 1166년 죽으니, 3일간 조회를 폐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