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신천 출신. 1906년 황해도 안악에서 김구(金九)와 함께 공부하다가 평양으로 건너가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 김구가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잡힌 뒤 그 뒤를 이어 독립투쟁을 계승, 발전시켰다. 그러나 1911년 2월 일본경찰에 잡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 9개월 만에 2년 3월의 원악도(遠惡島) 유배형(流配刑)을 받고 전라남도 진도에서 복역하였다.
1914년에 풀려나 고향 신천으로 귀향한 뒤에도 군자금을 모집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목표로 삼고 일본 관청이나 현금우송차 등을 습격,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본경찰에 잡혔다.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1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17년 5월 파옥(破獄), 탈출하여 만주를 거쳐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 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가담하였는데, 직접적으로 임정요원으로 활동하기보다 중국망명 교민들의 권익과 교육에 헌신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황훈(黃勳)으로 이름을 바꾼 뒤 한국교포 2세를 교육하는 인성소학교(仁成小學校)의 평교사로 들어가 민족교육을 주로 강의하다가 여운형(呂運亨)의 후임으로 교장이 되었다.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의 외곽단체인 거류민단(居留民團)의 단장도 겸임하면서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옹호, 지원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