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完山: 전주)의 관리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의종 초에 경산부(京山府: 星州) 판관이 되었는데, 성품이 깨끗하여 이속(吏屬)을 존중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임기가 끝나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권세가를 찾지 않아 10여 년이나 벼슬을 못하다가, 그 청직함을 들은 판이부사(判吏部事) 최윤의(崔允儀)의 천거로 탐라령(耽羅令)이 되어 이익을 일으키고 폐단을 고쳐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
임기가 끝나서 서울에 돌아왔는데, 최윤의가 이미 죽었으므로 천거해주는 사람이 없어 벼슬을 못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마침 전라도안찰사가 “탐라사람들이 영(令)·위(尉)의 포악을 괴로워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말하기를 ‘만약 최척경을 영으로 삼으면 군사를 거두겠다.’ 한다.”라고 치주(馳奏)하므로, 왕이 능라를 하사하고 탐라령에 임명하니 탐라사람들이 안정하였다.
1171년(명종 1)에 소환되어 첨사부주부(詹事府注簿)가 되었고, 뒤이어 감찰어사가 되었다가 좌정언 지제고(左正言知制誥)가 되었으며, 양광·충청 2도의 안찰사를 거쳐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郎)이 되었다가 다시 외직으로 나가 안북도호부부사(安北都護府副使)가 되었다.
그 뒤 여러 번 예부시랑과 비서감을 역임하였는데, 맑고 절개가 굳었다. 일찍이 시랑 박춘령(朴椿齡)이 완산의 수령으로 있을 때 연구(聯句)로써 시험하여 최균(崔均)·최송년(崔松年)과 함께 셋이 뽑혔는데, 뒤에 그 세 사람이 모두 이름난 선비가 되어 당시 이들을 ‘완산삼최(完山三崔)’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