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만년(萬年).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으로 건너갔다. 이후 이용규(李龍奎)·김관봉(金寬鳳)·김광진(金光振) 등이 권유하여 오동진(吳東振)이 단장으로 있는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에 들어갔다.
1919년 5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김광진·고학운(高學運)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의주군 가산면 도금동(都琴洞)의 김준석(金俊碩)에게서 31원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후 중국 상해(上海)로 가서, 1922년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이유필(李裕弼)·조상섭(趙尙燮)·손정도(孫貞道)·김인전(金仁全) 등이 결성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였다. 한국노병회의 제7차 이사회에서 특별회원 자격으로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채군선(蔡君仙)·박희곤(朴熙坤)과 함께 뤄양강무당[洛陽講武堂]에 입학했으며, 수료한 다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원(警務員)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공창렬(孔昌烈)·엄항섭(嚴恒燮)·김상덕(金尙德)·신언준(申彦俊) 등과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를 발기하였다.
그 뒤 『독립신문(獨立新聞)』 주간으로 활약했으며, 상해의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해 1926년 말경 이화익(李化益)과 함께 사이토[齋藤實] 총독 주살을 계획,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즈음 나석주(羅錫疇)가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행하여 경비가 매우 삼엄해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신의 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