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재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전기 판호부사, 검교태부,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이칭
영여(令如)
시호
양숙(襄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135년(인종 13)
본관
직산(稷山)
주요 관직
문하시랑평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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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전기 판호부사, 검교태부,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개설

자는 영여(令如). 직산최씨(稷山崔氏)의 시조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무인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 기개와 절개를 숭상해 말타기를 좋아하고, 음보(蔭補)로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웠는데, 출정할 때 부처가 보호해 준다면 개국사(開國寺)에 대장당(大藏堂)을 창건할 것을 맹세하였다. 돌아와 군사를 동원해 대장당을 창건하였다.

1113년 전중감(殿中監)으로서 요(遼)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16년에는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서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원수(元帥) 김인존(金仁存)과 더불어 금(金)나라의 군대를 물리쳐 포주(抱州: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를 회복하고, 또 의주성(義州城)을 쌓아 그 공으로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1120년 형부상서, 1122년 추밀원사판삼사사(樞密院使判三司事)가 되었다. 같은 해 인종이 즉위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으면서 이자겸(李資謙)과 한 패가 되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한안인(韓安仁), 합문지후 이중약(李仲若) 등을 죽였다.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1124년(인종 2) 지위가 높아지고 궁술과 기마술이 능해 여러 번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우자 더욱 권세가 높아졌다. 당시 이자겸은 자신을 위협할 사람으로 최홍재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무인(武人) 권인(權因)이 최홍재가 장군 정정숙(鄭旌叔) 등과 함께 모의를 도모한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이자겸에 의해 승주(昇州: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 욕지도(褥地島)로 귀양 갔고, 그 아들 최상(崔翔)·최온(崔溫)·최단(崔端)도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제거된 뒤 다른 사람들은 곧 소환되었으나, 최홍재는 이자겸에게 붙어 한안인 등을 죽인 죄로 소환되지 않다가 1128년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1131년에 참지정사가 되어 궁궐 중수의 감독을 맡았다. 그 해 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으며 뒤이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봉해지고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되었다. 이듬해 평양 궁궐 수리의 감독을 맡았다.

최홍재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 가산(家産)이 탕진했다고 떠들면서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팔다가 1133년(인종 11)에 간관(諫官) 최유청(崔惟淸)에게 탄핵을 받아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좌천된 뒤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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