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기. 1982년 3월 고분이 있는 신매지구 농경지 정리작업 중에 고분의 천장에 놓였던 뚜껑돌〔蓋石〕이 밀려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고분은 1982년 3월 20일부터 3월 31일까지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긴급 수습발굴조사를 실시함으로써 고분의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규모는 주실의 길이가 190㎝, 너비 138㎝, 최대 높이 130㎝이고, 연도는 길이 200㎝, 너비 80㎝, 높이 90㎝이다. 고분 내에서는 유물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으나 남녀 두 사람의 뼈가 발견되어 합장묘임을 알게 되었다.
고분 내부의 바닥에 시체를 올려놓기 위해 마련된 시상대(屍床臺)는 작은 막돌을 깔고 틈새와 막돌 위로 회(灰)를 메워 발라 두께가 10㎝ 정도 되었다. 이 시상대 외의 바닥도 전면에 회를 5㎝ 두께로 깔았다.
내부 네 벽의 이음새에는 회를 두껍게 발라 서로 엉키게 해서 벽을 튼튼하게 유지하도록 하였다. 축조방법은 연도부(羨道部)의 양벽을 2단으로 쌓았고, 시체를 놓아두는 주실(主室)의 벽은 3, 4단으로 쌓아올렸다. 모든 벽은 비교적 큰 자연석과 냇돌을 사용하였다.
석실 안의 모서리를 죽여 쌓기 위한 모줄임은 넓고 긴 장방형의 판상석(板狀石)을 사용해 2단으로 하였다. 그 위로 둥글고 큰 편평한 돌을 올려 천장석으로 하였다. 연도의 입구는 판상석 하나를 세워 막았고, 연도 위의 개석도 판상석으로 덮었다.
강원도 춘성지역에서 고구려형식을 갖춘 모줄임식천장〔抹角式天障〕의 석실분의 규모와 내부가 밝혀지게 된 것은 이 고분이 최초이다. 또한 내부의 바닥과 시상대가 회다짐으로 처리된 것도 처음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 고분은 비록 고구려지역에서 이러한 규모의 석실에 보이는 벽화는 없지만 고구려 단실분(單室墳)의 양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음을 볼 때, 축조시기는 적어도 6세기 중반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으며, 지방의 한 호족무덤으로 여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