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의 신파극단이었던 혁신단(革新團)의 공연이 어렵게 된 무렵인 1918년 2월에 김소랑(金小浪)을 좌장으로 하고 숙련된 배우 수십 명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신파극단이다.
자금은 김소랑의 처 마호정(馬豪政)이 대었다. 단성사(團成社)에서 창립공연을 가졌으며 신극사상 두번째 여배우인 마호정을 부좌장으로 삼아 이채를 띠었다.
이 극단은 1920년대 초까지 단성사를 본거지로 삼고 <야성 夜(野)聲>·<진중설 陣中雪>·<천민 天民>·<사람의 원수>·<선처(善妻)와 양녀(良女)>·<불여귀 不如歸> 등을 공연하여 대중의 폭넓은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1923년에 우리 것다운 신극을 공연한 토월회(土月會)의 등장으로 신파극단들은 흩어지거나 지방으로 밀려나 유랑극단이 되었는데, 이 극단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결속하여 신파극의 맥을 이어나갔다. 지방공연을 다니면서도 토월회에 자극을 받아 부단히 자체개혁을 하면서 이른바 개량신파극을 하였다.
따라서 이 극단은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신파배우들인 강홍식(姜弘植)·성광현(成光顯)·전경희(全景希)·이종철(李鍾哲)·이애리수(李愛利秀)·이경설(李景雪)·신은봉(申銀鳳)·전옥(全玉)·나품심(羅品心) 등을 단원으로 포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2년 동안 이 극단을 이끌던 김소랑·마호정 부부가 재정적으로, 또 건강상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에 1929년 말엽에 해산하고 말았다.
이 극단은 토월회라는 신극의 영향을 받아 저질 신파극을 개량한 개량신파극을 공연함으로써, 1910년대보다는 질적으로 나은 신파극을 대중에게 제공한 1920년대의 대표적 신파극단이다. 이 극단의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뒤에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를 탄생시켰다.